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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Feb 06. 2019

세련되게 후려치는 '돌려까기의 기술'

하수가 혈압이 오르고 뒷목을 잡을 때, 고수는 소설을 쓴다.

그러니까, 진심이란 말이야? 진짜?


연휴를 앞둔 금요일 밤, 강남. 우리는 도로와 식당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피해 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 날은 새로운 사람들과 처음 만났지만 소설을 쓰겠다는 목표로 모여서 그런지 어색함은 없었다. 다들 나이스하시구나, 괜찮은데. 딸기우유를 홀짝거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좁은 공간에서 3시간 동안 합평을 끝내고 저녁까지 먹었더니 몸이 늘어졌다. 이미 10시도 넘었고 눈은 감겼는데, 사람들의 대화가 끊길 생각이 없었다. 언제 가는 거지? 하고 눈에 힘을 주는데, 한 남자가 최근 이슈를 꺼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남녀동수법. (참고: https://news.v.daum.net/v/20190127140719509 (뉴스1) 박영선 ‘남녀동수법’ 발의...”여성 참정권의 구체적 제도화 기대”)


한 남자가 말하길

"이건, 이건 안 되는 거예요."

그 옆의 한 여자가 말하길

"왜죠?"

그러자 한 남자가 이어서 말하길

"정원의 50% 이상을 여자로 채운다면 사회의 이성적인 부분이 다 무너질 수 있어요."

자, 여기서부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물론 이 법안 발의가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지금 이미 어느 조직이든 정원의 80% 이상이 남자잖아요. 이제부터 그냥 수적으로 동등하게 만들자고 발의만 한 거잖아요."

"이건, 안 돼요. 사회 조직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지금 여자를 차별하는 것을 없애야지, 반대로 남자를 차별하는 쪽으로 가면 안 돼요."


맞은편에서 팔짱을 끼고 대화를 듣고있던 나의 심장 박동이 몹시 빠르게 뛰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정말 인터넷에서만 보던 그 이야기들을 내 귀로 들은 거지? 이 남자는 실행될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여자들의 인권을 높이자는 시도를 남자를 차별한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방금 전에 꼰대 얘기가 나왔을 때 "나 불렀어요?" 하고 받아쳐서 위트 있는 중년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진심이었던 거지? 우와, 신기하네.


나도 뭐라고 말을 얹고 싶었지만 -은행권 면접에서 여자들의 점수를 남자보다 일부러 낮게 책정했던 뉴스들, 남자들의 입사를 위해 여자들을 전원 탈락했다는 뉴스들 등등 사실 이전부터 모두가 암암리에 알고 있었으나 그게 진짜라는 것이 확실시된 그 모든 사건들- 그들은 누구에게도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널 후려차주는 고수의 <돌려까기 기술>이 나타나는데


"그럼 여자들이 많아지면 이성적이지 않다는 말?"

"이건 안 되는 거예요."

"이거 봐. 여자들은 그냥 자신들의 위치를 동등하게만 해달라는 건데 남자들은 그게 핍박받는 줄 안다니까요."

"아니, 말이 안 되잖아요. 물론 차별하는 거 있어서는 안 돼요. 그런데 차별 때문에 지금 남자들의 위치를 위협하면 안 되죠. 지금까지 만들어온 사회 구조가 있는데."


오, 진짜다. 안정적인 중산층의 중년 남자의 생각이 이렇다는 거지? 갑자기 여기저기서 한 사람씩 말을 얹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졸리고 혼란스럽고 충격적인데 여기저기서 말을 하기 시작하니 이것은 뭐랄까, 춘추전국시대에 어디선지 모르겠는데 일단 뿌연 먼지가 쫙 날리고 있고, 그 속에서 졸려서 마구간에 가고 싶었으니 먼지 때문에 방향을 잃고 일단 달려가는 말 한 마리가 된 것 같았는데...... 그냥 막, 힘들어. 막 지쳐. 그러나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난장토론 속에 선생님(직업: 소설가)이 입을 열었다.


"자, 봐봐요. 그걸 그대로 소설로 쓰는 거예요."

소설 이야기에 습작생들은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지금 OO 씨가 갖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캐릭터가 말하게 하는 거야. 지금 까지 말한 거 그거 그대로. 그럼 그걸 보는 사람들이 생각하겠지. 뭐 이런 나쁜 인간이 다 있어? 하고. 지금 시대에 아직도 이렇게 구닥다리로 생각한단 말이야? 기가 막히네.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캐릭터를 응원하겠지. 그렇지, 이래야 맞지. 이래야 사회가 안정적이지. 이렇게 글을 보는 사람들이 판단하게 하는 거야. 알겠죠?"


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선생님은 그 뒤로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 순간 나는 여전히 눈이 퉁퉁 부어서 졸려보였을 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개운해진 정신으로 무릎을 탁! 쳤다.


이럴 수가!

이것은 상대방이 절대 반박하지 못하게 고도로 후려치는 <돌려까기의 기술> 아닌가?  눈앞의 인물을 가상의 인물로 대상화해서 세련되게 돌려까버리다니. 박수, 박수(짝짝짝)! 매우 졸렸지만 눈이 딱 떠지며 한 수 배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고수다(풀잎 아니고요), 고수가(다비드 고도 아니고) 나타났다.


아련하게 지나가는 하수의 기억들


아, 그동안 나는 얼마나 하수였던가.............

2년 전 한 모임에서 - 알만한 대학에 나와, 알만한 기업에서 일하는 한-남자가

"요즘 여자들 대체 왜 그래요? 지금까지 아무 말 없었잖아요. 난 정말 여자들이 차별받고 산 거 모르겠어."

라는 말을 직접 들었을 때, 얼마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요동쳤는가. 이거 진심이지? 진짜로 궁금한 거지? 지금 인터넷 세상 속 아닌 거지? 게다가 그 사람이 자기는 여자가 주인공인 페미니즘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뒷골이 땡겨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굳이 얼굴이 붉으락해져서 "진심인 거죠?"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고 몇 분 후 우리 테이블은 어색해졌고 나는 그날 밤 잠을 잘 못 잤던 거 같은데.


아, 나는 얼마나 하수였던가. 늘 면전에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지성인이라면 감히 이런 말들을 내뱉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들었을 때, '당신 진심이지? 나 지금 충격 먹었다.' 하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아마도 스며 나오던) 표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던 나는 얼마나 하수였던가.



고수가 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쌀국수에서 고수 먹어본 것도 어언 1년이 넘어가는 요즘(그러고 보니 최근 쌀국수를 안 먹었네).

나는 강남의 넘쳐나는 사람들 속에서 - 진정한 고수(풀잎 아니에요, 다비드 고 아니죠.)를 만났다.

고수는 직접적으로 터치하지 않는다.

고수는 소설을 쓴다.


"봐바요, 이렇게 생각해봐요........"

"그래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있다고 칩시다......"


나는 언제쯤 고수가 돼서 무례한 사람의 되도 않는 말들의 폭격 속에서 혈압도 오르지 않고 충격도 먹지 않고 뒷목도 잡지 않고 한껏 미소를 지으며 '너의 그 말이 참으로 쓸데없고 그 말을 하는 너는 참 별로구나.'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상대방이 눈치채건 말건 절대 반박할 수 없게 고도로 후려쳐주는 <돌려까기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을까? 그 날이 오긴 오겠지?


나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돌려까기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 충격을 받으면 혈압이 올라 뒷골이 땡겨서 근육이 굳어버리면서 심장에 무리가 가서 부정맥으로 이어지면 누가 손해인가? 하수인 내 손해다. 그런데 고수가 되면 뒷목 잡을 일도 없고, 심장에 무리가 가지도 않고, 이 얼마나 건강하고 안전한가!


소설 계속 써야 하는 이유가 하나는 더 생겼다. 정말, 설렌다.

나, 정말 멋지게 돌려까줄거야.



세련되게 후려치는 ‘돌려까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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