깰 수 있는 사람은
오늘 문득, 그러니까 며칠 째 밤잠도 자지 못하고, 짜증스러운 날들을 보내며 다크서클을 달고 회사에 다니다 평일에 쉬게 된 오늘. 11월 부터 정리하던 이야기를 과연, 중편소설로 마무리해서 신춘문예에 낼 수 있을지, 이건 장편감이라 내년에 공모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다가 새벽 1시에에 잠들어서, 오랜만에 늘어지게 잠든 오늘. 아침 10시에 진동하는 상사의 전화를 무시하고, 다시 침대로 파고들었던 오늘. 이제는 전화를 무시해도 어떤 죄책감이나 불안함도 생기게 되지 않은 오늘. 그래서 진짜로, 더는 무엇도 나를 훼손할 수 없음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게 된 오늘.
따수미 텐트 안에서 극세사 이불에 파묻혀서, 평온한 마음으로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던 나는, 문득.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쓰고있던 이야기가 결국엔, 내게 하고싶던 말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야기의 형식이나, 장르나, 공모나 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라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 지,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다른 사람한테 의견을 구할 필요도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내게 준 의견들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의 의견, 흘려들어도 상관없는 의견일 뿐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멈추게 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나는 자꾸 밖으로 눈을 돌린다.
불안해질 때마다 내가 닿을 수 있는 온갖 곳에 연락을 해서 내 상태를 얘기하고, 의견을 물었다. 똑같은 말을 여기 하고, 저기 하고, 다른 사람에게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하고, 또 또 또 다른 사람에게. 주절주절주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게 주정이랑 다를 게 없다. 술 취한 사람이 판단력이 흐려지듯, 불안에 잠식된 나도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러니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내 안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교성이 좋으니 다행이지, 아니라면 시도도 못해 볼 주정이었다.
주변인들 입장에서는, 얘가 왜 이러나 했을 것 같다. 평소에는 남의 시선 같은거 신경도 안 쓰고 혼자 마이웨이로 고고 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은 비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나 살려달라고 하고 있다니. 거의 지킬 앤 하이드 급 아닌가?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뭐냐고. 게다가 그들이 봤을 땐, 분명히 답을 갖고 있다는게 티가 났을 거 같다. 바로 등 뒤에 비 맞지 않을 공간이 있는데 고통스러워하면서 '휴식처가 어디있어?' 하고 물어보고 있었을 거다.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지.
하지만 이제 나는, 이런 도움요청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글을 쓰던 내가 불안해지는건데, 타인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빨리 날 진정시켜 달라고, 안정을 달라고, 하는 무리한 요구들을,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불안에 취해, 주정을 부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정이 계속되면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한다. 처음에야 받아주지, 술꾼을 피하는 것처럼.
사실은, 내 안의 불안을 직면해야 하는 거였는데.
창작에 있어서, 타인은 언제까지나 외부세계에 머문다. 창작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남은 내가 될 수 없고, 나의 불안에 공감해줄 지언정, 진짜는 모른다. 애석하지만 냉정한 현실. 공감받으면 힘은 나고 위로는 되지만, 어쨌든 글을 대신 써주지는 않는다. 그 힘을 받고, 글을 써야하는 건 나인데, 자꾸만 힘들 때마다 주변을 찾고, 위로 받으려 하면 나약해지기 쉽상이다. 정말로. 자꾸만 멈추게 된다. 왜냐면, 돌파구를 찾아서 뚫고 나가는 것보다 이게 훨씬 쉽고 편하니까.
그러니까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했다. 뭐가 이렇게 힘든걸까.
실제로 힘든 일들을 하고있어서 그랬다. 글을 쓰는 일은 되게 힘들다. 일단 하고싶은 말부터 뚜렷해야 하는데, 보통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착각해서 글을 쓰다보면 언제나 길을 잃어버린다. 다 안다고 생각해서 쓰지만, 사실은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난관에 봉착한다.
회사생활은? 말해 뭐해, 무척이나 힘들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고, 그들과 함께 최소 8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나한테 달라붙어서 24시간 내내 머무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다들 이런 걸 어떻게 견딘거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런데 회사 다니면서 글쓰려니 그냥 힘들어서 죽는소리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덧셈이 아니라 곱셉, 혹은 제곱으로 올라가는 수준인데 그걸 몰라서 맨날 '왜 이렇게 힘들지? 뭐가 문제지?'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제일 이상한 점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나날이 지속되고,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면, 그 뒤에 무언가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는 거다. 나는 아직도 이게 무슨 과정인지 모르겠다. 죽음의 순간에 살려는 생존방식일까? 원래 사람은 극악의 순간, 생명이 위급해지는 순간이 오면 괴력을 발휘한다고 하던데. 절벽을 기어오르고, 차를 들어올리고 하는 것처럼. 극악의 정신적 고통에 놓일 때마다 나의 무의식이 날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 하는 걸까?
그렇게 여러번의 응급사태를 겪은 후, 내가 깨달은 점은, 내가 엄청나게 불안한 나날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땐 태평하고 멀쩡해 보였을지라도, 그 안에는 태풍이 몰아치고 맨날 허리케인에 날아가고 난리가 나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다시 실패하기 싫어서였다. 작년처럼, 영혼이 피폐해지는 경험을 하고싶지 않아서. 그래서 자꾸, 불안할 때마다 주정을 부리며, 나름의 살기 위한 발악을 했던 것 같은데, 수많은 시행착오와 창피함과 부끄러움과 의아함의 나날들이 지난 뒤, 마침내 깨닫고 만 것이다.
내가 만든 불안함이니까 남한테 주정부려봤자, 달라지는 거 없다고.
이걸 깰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그러니 나는 밖으로 자꾸 돌아가는 시선을, 다시 잡아와서, 계속 안으로 붙들어 매야한다.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어질 때, 그때가 바로 내면이 나를 초대하는 순간이다. 진짜 마음이 나를 부르는데, 무섭다고 도망가고 있던 셈이다.
이제 나는 선생님의 의견, 동료들의 의견, 친구들의 의견, 누군가의 의견보다, 내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 어차피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전부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모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나였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유일한 독자가 있다면 그것도 나여야 한다. 그러므로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형식은 상관없다. 분량도, 장르도 상관없다. 상을 타고 말고도 상관없다. 이 모든 것들은 이후의 이야기다. 첫 번째 독자인 내가, 오래된 궁금증을 해소하고, 위안을 받고, 불안을 해갈한 뒤에, 그 뒤에 이어질 것들.
타인의 의견이나, 혹은 타인의 존재는 사실상 상관없는 거였는데, 나는 그게 너무 중요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나는, 여러 작가들이 말하던, '나에게 들려주고 싶던 이야기를 썼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들도 엄청난 불안감 속에서, 꿋꿋하게 글을 써왔을거란 사실도.
불안과 창작을 뗄 수 있을까?
내가 그걸 떼어내려고 엄청나게 시도했는데, 결국엔 그냥 평생의 동반자처럼 같이 가야한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그렇다면, 싸우지 말고 잘 지내는게 최선이다. 내가 언제 불안해지는지, 언제 고독해지는지, 언제 나약한 습성들이 튀어나오는지, 그런 것들을 잘 알고 대비하고, 잘 활용하는게 낫다.
왜냐면, 그것도 다 나니까.
평생의 동반자도 이상한 말이다. 그냥, 나의 일부다. 낯설어서 벗어나고 싶은 모습마저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참 단순하고 머리로는 다 이해했던 것들을, 진짜 마음으로 깨닫기까지,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1년, 10년, 혹은 평생. 그걸 나는 계속, 써내려가야 하겠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