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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연필 Jan 05. 2024

홀로 덩그러니 남은 피아노를 바라보며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관람하고 나서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중에서

*이 글에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 대한 누설이 담겨있습니다.


2023년도 마지막 극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103분, 1시간 43분 동안 오롯이 피아노의 선율만으로 보낼 수 있었던, 낯설지만 한 편으로는 진귀했던 경험을 떠올리게 됩니다.


2023년도 3월 28일의 일기를 끝으로 눈을 감은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공연을 영상으로 기록한 공연 작품인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관람하는 다른 작품들과 다른 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막 관람하기 시작했을 때, 사카모토 류이치 본인을 비롯한 주변 인물이 대한 인터뷰 같은 형식이 부록처럼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인터뷰 형식의 장면들은 단 한 개도 없었으며, 103분 동안 사카모토 본인이 작곡한 스무 개의 곡들을 연이어 연주하는 순간만을 오롯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특정 곡에 대한 연주가 불안정하게 들리고 나서, 그 곡의 연주가 끝나고 나서 사카모토가 ‘다시 한번 합시다’ 혹은 ‘잠시 쉬었다 하죠’ 같은 곡과 곡 사이의 막간처럼 다가오는 극히 적은 대사를 제외하면, 말 그대로 연주로 시작하여 연주로 끝맺음을 이루는 작품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담당한 상업영화로써는 유작이었던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의 사운드트랙은 모두 일곱 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다섯 곡은 사카모토의 허락하에 기존에 만들었던 곡들을, ‘Monster 1’, ‘Monster 2’는 사카모토가 처음에는 자신의 건강으로 인해 거절했으나, 고레에다가 전달한 영화 <괴물>의 가편집본을 보고 만족하여 새로 써낸 곡들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마지막 연주의 순간을 담은 이번 작품까지, 그는 마지막까지 뮤지션 혹은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의 몫을 모두 성실히 해냈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혼은 마지막까지도 선명히 불타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는 ‘The Last Emperor’, ‘happy end’, ‘Aqua’ 등 대중에게 많이 사랑받은 곡들도 들을 수 있었지만, ‘20220302’, ‘20180219’ 같은 그가 거의 마지막 즈음 작업했던 곡들도 함께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연주된 스무 곡 외에도, 사카모토 류이치 하면 떠오르는 곡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예를 들면 ‘to stanford’, ‘koko’ 같은 곡들이 빠진 점에서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3분 동안 이어진 연주의 향연은 그야말로 마법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흑백의 색감으로 맞춰진 화면과 더불어, 사카모토의 왼편에 배치된 환한 둥근 스탠드 조명은 마치 달처럼 느껴졌는데, 문득 드뷔시의 오랜 명곡 ‘달빛’이 떠오르는 감정도 들었습니다. 사카모토가 드뷔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생전에 인터뷰로 언급하기도 하였고, 때때로 저는 사카모토 류이치는 우리 세대의 드뷔시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을 만큼, 어둠 속에서 스탠드가 하나가 오롯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카모토를 비추는 장면은 지금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을 관람하면서, 저 스스로도 이 작품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고 있구나를 느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서로 연주된 ‘opus’가 연주되기 시작하자, 드디어 영화가 인사를 하듯 연주된 스무 곡의 곡명과 함께 이 작품에 참여한 제작진의 크레딧이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opus’를 연주하던 사카모토의 모습이 크레딧이 올라오는 사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홀로 남은 피아노만이 스스로 건반을 누르며 음악이 계속 들려오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비현실적인 연출이었으나, 이 장면을 처음 접한 저는 황당하거나 이상하다는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이제 그는 떠나갔고, 그의 유산처럼 남은 음악만이 시대를 지나 계속 연주되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마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홀로 남은 피아노 스스로 꾸준히 곡을 이어 연주하는 장면이 지나가고 나서, 화면 밖에서 누군가의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을 뒤로 마침내 작품이 끝났음을 알게 되고, 극장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는 그때의 순간을 잊기 힘들 것 같습니다.


‘Ars longa, vita bresvis.’(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이 말을 사카모토 류이치가 생전에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티스트로서의 마지막 기록을 체험하며, 이 오래전부터 전해진 문장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 떠난 그를 앞으로도 계속 떠올리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도 그의 유산 속에서 나날을 살아갈 것이라는 아쉽고도 아름다운 확신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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