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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소원 화수분

by 야담

1. 신화 이야기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풍요의 뿔(Cornucopia)은 단순한 물질적 상징을 넘어 자연의 힘과 신의 은총이 깃든 상징으로 자리한다. 이 뿔이 신화 속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 중 하나는 강의 신 아켈레오스와 영웅 헤라클레스가 벌인 결투 이야기다. 아켈레오스는 자연의 거대한 흐름, 곧 강을 의인화한 신이며, 헤라클레스는 인간의 의지와 힘을 극대화한 반신반인 존재다. 두 존재가 맞붙은 이유는 오이네우스 왕의 딸 데이아네이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한 경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흔한 연애 경쟁담을 넘어선다.



헤라클레스는 12과업을 완수한 후였고 이미 인간을 넘어선 힘을 지닌 존재였다. 이에 맞서는 아켈레오스는 인간의 신체로는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뱀으로, 황소로 변신시키며 전투 방식을 바꾼다. 뱀의 경우 헤라클레스는 어린 시절 이미 요람 안에서 뱀을 맨손으로 죽인 경험이 있어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시도로 아켈레오스는 거대한 황소로 변신했으나, 헤라클레스는 그의 뿔 하나를 단숨에 꺾어버린다.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자연의 무한함과 야성을 인간의 힘이 꺾고 다스리는 장면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헤라클레스에 의해 꺾인 아켈레오스의 뿔은 그저 부서진 신체 일부로 끝나지 않는다. 이 뿔을 물의 요정이 주워 그 안에 과일과 꽃을 담아 신에게 바쳤고, 이에 신이 축복을 내려 어떤 것이든 끊임없이 나오는 풍요의 뿔, 곧 코르누코피아로 만들어주었다. 여기서 뿔은 단순한 전리품이 아닌 자연과 신성의 교차점에서 생성된 새로운 능력의 상징이 된다.



다른 이야기에서도 풍요의 뿔은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아말테이아의 뿔 이야기는 이 상징이 어떻게 신의 은총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식이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태어나는 자식마다 집어삼키는 끔찍한 행위를 반복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며 이러한 행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간의 본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제우스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 레아는 막내를 몰래 크레타섬에 숨겨 키우게 하는데 이때 젖을 먹이며 그를 돌본 존재가 바로 아말테이아였다.



전승에 따라 아말테이아는 염소이기도 하고 그녀가 기르는 염소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어느 날 장난으로 염소의 뿔을 하나 꺾었고 그는 그 뿔에 무한한 축복을 내려 어떤 음식이든 끝없이 나오는 풍요의 뿔로 만들었다. 제우스가 왕이 된 후 하늘로 올라가면서 아말테이아에게 이 뿔을 선물로 주었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이처럼 풍요의 뿔은 단순한 물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한 존재에 대한 보상이며 신의 축복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풍요의 뿔은 죽음과 저승을 다스리는 신 하데스에게도 이어진다. 하데스는 플루톤(Plouton)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이는 곡식의 신 플루토스와 어원을 공유하기도 한다. 플루톤은 단지 음울한 저승의 신이 아니라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광물과 곡식, 즉 풍요의 근원이 되는 신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손에도 풍요의 뿔이 들려 있었으며 이는 죽음 이후에도 생명과 자원의 순환이 계속된다는 고대인의 인식이 반영된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풍요의 뿔은 때로 인간의 욕망과도 맞닿는다. 프리아포스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아프로디테와 디오니소스 사이에서 태어난 프리아포스는 온몸이 뒤틀리고 성기가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게 태어난 존재였다. 여신조차 아들을 거부할 정도였고 그는 자연 속에 버려졌다. 그는 어느 날 요정 로티스에게 욕망을 품고 덮치려 했으나 나귀가 우는 소리에 로티스가 깨어 도망쳐버린다. 결국 로티스는 연꽃이 되었고 이후 프리아포스는 나귀를 증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서 프리아포스의 거대한 성기는 다산과 번식의 상징이자 동시에 욕망이 통제되지 않았을 때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역시 풍요의 뿔을 과잉된 모습으로 지닌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풍요는 축복이지만 그 자체로 욕망과 결합될 경우 질서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헤라클레스, 제우스, 하데스, 프리아포스 등 여러 신화 속 인물들과의 서사를 통해 풍요의 뿔은 단지 물질적 풍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신,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부여된 능력임을 알 수 있다.




2. 각국의 신화




풍요의 뿔은 그리스 신화에서만 발견되는 개념은 아니다.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신화 속에서도 화수분이라는 개념은 각자의 자연환경, 생존 방식, 세계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인류 보편의 상상력 속에서 풍요를 바라는 마음이 어떻게 상징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북유럽 신화에는 끝없이 꿀술을 생산하는 염소 헤이드룬과 무한한 식량을 제공하는 짐승 엘드흐르니르가 등장한다. 전사들이 죽은 뒤 도달하는 발할라에서 이 두 존재는 매일같이 전사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공급한다. 여기서 화수분은 전사적 삶의 보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전투와 영예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형태다.



인도 신화에서는 풍요의 젖소 카마데누가 있다. 이 젖소는 신성한 존재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제공하며 신들이나 수행자들의 바람을 이뤄주는 존재로 묘사된다. 또 다른 예로는 악샤야파트라라는 그릇이 있는데 이 그릇에서는 음식이 무한히 나와 가난한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다. 인도에서 화수분은 주로 무욕과 봉사의 가치를 중심으로 형상화된다.



중국의 전설에는 정화라는 솥이 있으며, 여기에선 음식이 무한히 끓어 나온다. 무한한 쌀 항아리 역시 전통 설화에서 등장하는 상징물이다. 일본에서는 다이코쿠텐의 자루가 대표적인 풍요의 상징으로 무한한 쌀이나 금화를 뿜어낸다. 한국에서는 반고사(밥솥), 장생 바위,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들이 풍요를 상징한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과 연결된 일상적 도구가 초자연적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켈트족의 신화 속에는 다그다의 마법 가마솥이 있으며 이 가마솥에서는 끊임없이 음식이 나와 전투 후 병사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데 쓰였다. 유럽의 민담에서도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마법 식탁보, 금을 뿜는 당나귀 등 다양한 형태의 화수분이 존재한다.



이렇듯 화수분은 시대, 지역, 문화에 따라 그 내용물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는 신성한 존재로부터 조건부로 제공되는 무한한 풍요라는 속성을 공유한다. 또한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태도에 따라 복이 되거나 재앙이 되기도 하는 이중적 속성을 갖는다.




3. 신화와 문학




고대 신화 속 풍요의 뿔은 현대 문학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상징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진정한 풍요가 물질이 아니라 나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색했던 스크루지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며 점차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타인에게 베풀게 되는 과정은 풍요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문학적 진리를 담고 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이타심의 순환이야말로 생명을 지속시키는 화수분이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늙은 화가가 자신의 생을 희생하며 병든 젊은이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주는 장면은 신화 속 뿔에서 음식이 나오는 장면 못지않게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이 외에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주문으로 여닫는 동굴은 욕망과 절제가 맞물린 화수분의 변형이라 할 수 있으며, 피노키오에 등장하는 요정과 마법은 소망을 이뤄주는 초월적 존재이자 인간의 성숙에 따른 조건부 보상을 보여준다. 오즈의 마법사는 결국 각 인물의 마음 안에 있던 힘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화수분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문학은 이처럼 신화 속 뿔의 형상을 점차 인간의 정서와 도덕,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정신적 자산으로 바꾸어왔으며 이를 통해 독자에게 어떤 풍요가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4. 고찰




신화와 문학을 관통하며 반복되는 것은 단순한 풍요에 대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가 무한히 주어진다는 상상 속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다. 화수분은 언제나 신성한 존재로부터 내려왔고 그것은 인간에게 무조건 허용되지 않았다. 자연의 에너지를 제압하거나, 생명을 보살피거나, 극단적인 욕망에 도전했을 때, 즉 일정한 조건과 태도 아래에서만 그 뿔은 열린다.



신화 속 풍요의 뿔은 주로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제압의 결과물로서 헤라클레스가 자연의 힘인 아켈레오스를 이겨 얻게 된 뿔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이기고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 속에서 얻은 보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는 보호의 보상으로서 아말테이아처럼 생명을 돌본 존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는 생명 유지의 가치, 곧 타자에 대한 돌봄이 화수분이라는 형태로 보상받는 구조다. 셋째는 통제와 질서의 상징으로 하데스의 손에 들린 뿔은 죽음과 재생의 균형 속에서 풍요를 의미한다. 이처럼 뿔은 신의 권능이자 자연의 질서이며 인간이 신과 자연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설 것인가를 묻는 질문 그 자체다.



그런데 이 풍요는 언제나 조건부이며 절제가 함께하지 않으면 쉽게 파괴된다. 프리아포스는 다산과 번식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그 욕망이 통제되지 않았을 때 사회적으로 얼마나 불편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풍요와 욕망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하나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축복과 저주로 나뉠 수 있다. 실제로 화수분이 무조건 긍정적인 상징으로만 남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풍요를 원하면서도 그 풍요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는 종종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뿔의 상징은 전 세계의 화수분 전설 속에서도 되풀이된다. 가마솥, 젖소, 솥단지, 자루, 항아리 등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같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시대에 어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등장했는가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식량과 가축이었고, 중세에는 금과 보석이었으며, 현대에는 전기, 데이터, 노동력이다. 인간의 결핍은 기술과 문명의 변화에 따라 내용만 달라졌을 뿐 그 근본적인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즉 인간은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며 그 부족함을 신화적으로 치환한 상징이 바로 화수분이다.



그러나 결핍이란 단지 외부의 자원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구조적으로 허기져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욕망은 현실적 필요를 넘어 환상 속 무한함을 꿈꾸게 만든다. 그래서 화수분은 그저 채워지는 그릇이 아니라 채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욕망과 태도를 시험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모든 신화는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이는 고대 신화가 단지 시대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반복되는 인간 조건에 대한 근본적 사유였다는 것을 뜻한다. 신화가 반복적으로 말해주는 건 풍요의 뿔은 욕심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감사와 절제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그 뿔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파괴될 수 있으며 때로는 모든 것을 삼키는 저주로도 변할 수 있다.



현대의 화수분은 더 이상 전설의 뿔이나 솥이 아니라 시스템과 기술, 알고리즘과 자동화다. 우리는 이제 데이터를 무한히 생성하고 전력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인공지능과 로봇을 통해 끝없는 생산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끝없는 추구는 곧 자원 고갈, 정보 피로, 인간 소외, 기후 위기 같은 새로운 파국을 낳고 있다. 풍요는 오히려 새로운 결핍을 만든다. 이는 마치 신화 속에서 화수분을 과도하게 사용했을 때 벌을 받았던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구조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화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단지 이야기의 재미가 아니라 상징의 구조다. 풍요의 뿔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것은 윤리적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 열리는 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화수분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한다. 신화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으며 인간이 반복해서 선택을 잘못할 때마다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신화가 반복적으로 말해주는 건 풍요의 뿔은 욕심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감사와 절제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그 뿔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파괴될 수 있으며 때로는 모든 것을 삼키는 저주로도 변할 수 있다. 현대 사회가 다시 신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옛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5. 결론




21세기 인류가 갈망하는 화수분은 더 이상 곡식이나 황금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무한한 에너지, 재생 가능한 자원, 멈추지 않는 데이터 생산, 인공지능의 무한 노동력을 원한다. 현대 사회는 과거의 신화 속 화수분을 기술과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뿔 역시 통제되지 않으면 재앙이 된다. 기후 위기, 기술 격차, 데이터 과잉, 노동의 소외, 윤리의 공백은 현대의 풍요가 가져온 그림자다. 과거 신화 속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뿔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결국 풍요의 뿔은 물질적 상징을 넘어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세계를 대할 것인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이다. 신화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반복되는 이야기이며 그 속의 상징은 오늘날 우리 삶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뿔을 들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 시대의 신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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