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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제로 디오니소스

by 야담

신화 이야기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그의 출생에는 또 다른 전설이 얽혀 있다. 어떤 전승에서는 그가 제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의 아들 자그레우스의 환생이라 하며 티탄에 의해 찢겨 죽은 자그레우스의 심장을 제우스가 세멜레에게 건네주어 그 아이가 다시 태어났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처럼 디오니소스의 탄생은 단일한 서사가 아닌 파편화된 기원 신화들을 통해 전개된다.




그의 어머니 세멜레는 제우스의 본모습을 본 탓에 불에 타 죽고 제우스는 그녀의 태중에 있던 아이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어 만삭을 채운 뒤 세상에 내보낸다. 이후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시선을 피해 니사 산에서 여장한 채 자라난다. 그는 성인이 되어 술과 연회의 신으로 인간 사회에 등장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응징을 가한다. 대표적으로 테바이의 왕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다가 광기에 빠져 여장을 하고 마이나데스의 축제를 염탐하다 어머니 아가우에를 포함한 여신도들의 손에 찢겨 죽는다.




신화와 문학




디오니소스의 신화는 단순한 술과 연회의 기원 이야기를 넘어, 문학과 예술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핵심 상징인 광기, 죽음과 부활, 자유, 변신, 그리고 신비주의는 다양한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특히 그는 아폴론적 질서와 대립하는 디오니소스적 혼돈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며 이 둘의 충돌은 고대 비극뿐 아니라 현대 예술 전반에서도 반복되는 테마다.



문학에서는 억눌린 본능과 광기의 폭발을 다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대표적이다. 이성적 자아와 억압된 본능의 이중 구조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분열과 폭발의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또한 조지 오웰의 1984는 전체주의적 질서(아폴론적 요소)에 대항하는 인간 내면의 자유와 욕망(디오니소스적 요소)을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사랑과 반란은 감정의 폭발로 표현되며 이는 디오니소스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파괴와 재탄생의 서사와 겹쳐진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상징은 문학을 넘어 미술, 음악, 연극, 영화에서도 활발히 변용되었다. 미술에서는 카라바조의 바쿠스처럼 술과 쾌락 너머의 위태로운 감정 상태를 표현한 작품이 있으며, 음악에서는 형식미와 질서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아폴론적)와 격정과 해방을 강조한 낭만주의, 록, 재즈 등(디오니소스적)의 대비가 명확하다. 영화에서는 인터스텔라, 조커, 블랙 스완, 에반게리온처럼 논리, 과학, 시스템이라는 구조 속에서 감정, 사랑, 광기, 반란이 터져 나오는 작품들이 디오니소스적 주제를 강하게 반영한다.



이처럼 디오니소스는 단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예술 속 갈등의 상징이자 인간 내면의 해방 충동을 자극하는 존재로 끊임없이 호출되어 왔다. 그의 상징성은 시대와 장르를 초월해 언제나 새롭게 변형되며 살아 숨 쉬고 있다.



고찰1 - 디오니소스의 별칭과 신화적 해석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술의 신으로만 이해되기엔 너무나 다층적인 상징과 별칭을 지닌 존재다. 그의 신화에는 반복되는 핵심 개념들이 있다. 바로 변신, 경계 초월, 광기와 질서의 충돌, 그리고 죽음과 재생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그를 단순히 포도주의 수호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연을 반영하는 신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디오니소스는 두 번 태어난 신으로 불린다. 그의 어머니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그의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가 불에 타 죽게 되는데 이때 그녀의 태중에 있던 아이를 제우스가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이식해 만삭을 채운 뒤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는 디오니소스가 한 번의 생물학적 출생이 아닌 두 번의 신체적 탄생을 겪은 유일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둘인 자(디오메토르), 세 번 태어난 자(트리고노스), 거듭 태어나는 자(폴리고노스)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처럼 그의 출생 서사에는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재생의 신이라는 정체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해방시키는 신이지만 동시에 신성을 증명하려 집착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예술적 상징성도 크다. 디오니소스를 예술로 풀어내려 한 철학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을 구성하는 두 가지 근원적인 힘을 제시한다. 하나는 아폴론, 또 하나는 디오니소스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자 이성과 질서, 조화와 절제를 상징한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술과 본능, 광기와 감정의 신이다. 이 두 힘이 긴장 관계를 이루며 고대 그리스 비극의 뿌리를 형성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예술은 언제나 이성과 감성, 질서와 혼돈, 통제와 해방 사이의 균형 속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예술은 이성의 외피를 벗고 감정의 심연 속으로 추락하거나 반대로 감정을 말살한 채 형식만 남은 껍질이 된다.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통제에서 벗어난 감정의 폭발, 존재의 해체, 그리고 새로운 자아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방식이다. 술의 신이 광기와 변신, 여장을 동반하는 건 단지 상징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인간이 감추고 억압한 모든 것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그는 인간의 이성적 자아를 벗겨내고 감정의 맨살을 드러낸다. 우리가 디오니소스를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감정적이고 너무나 직접적이다. 그래서 고전주의적 미(美), 절제된 형식미를 중시하는 아폴론적 관점에서는 위협적인 존재다. 그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질서는 붕괴되고 감정은 탈주한다.



이 두 힘은 예술사 전반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르네상스 시대의 균형과 조화는 아폴론적 미학의 정점이었다면 낭만주의는 디오니소스적 열정과 내면의 폭풍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음악에서는 모차르트와 바흐가 형식미를 대표하는 반면 베토벤 이후의 음악은 점점 더 감정의 깊이와 표현의 자유를 추구한다. 문학에서는 소포클레스가 비극의 구조적 완성도를 추구한 대표적 인물이라면 에우리피데스는 인물의 감정과 비이성적 격정을 강조하며 디오니소스적 색채를 띤다. 한 인물 안에 존재하는 갈등,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신의 부름과 인간의 두려움이 충돌하는 그 지점이 바로 디오니소스의 자리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단순히 감정의 신이 아니다. 그는 감정을 통해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신성에 도달하려 한다. 그의 의례는 즐거운 연회가 아니라 트랜스 상태에 가까운 황홀경의 체험이다. 그 황홀은 단지 쾌락의 순간이 아니라, 자기 해체의 경험이다. 내가 너희에게 준 술은 칼이다라는 말처럼 그는 자루를 쥘 것인가 날을 쥘 것인가 묻는다. 술은 선택이지만 그 술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선택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 감정을 따를 것인가? 그것은 곧 예술이 언제나 다시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디오니소스는 예술의 본능, 감정의 원형, 광기의 경계에서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는 신이다. 그의 존재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우리가 감정과 본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시험한다. 그래서 그는 단지 술의 신이 아니라 감정을 둘러싼 윤리적 혼란과 예술적 해방의 아이콘이다. 그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감정을 억누를 수도,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다. 우리는 늘 그를 경계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유를 갈망한다. 디오니소스는 신이지만 동시에 인간 안의 미해결된 감정 그 자체다.



그의 술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의례이자 칼이다. 디오니소스는 내가 너희에게 준 술은 한 자루의 칼이다. 너는 자루를 쥘 것이냐, 날을 쥘 것이냐?고 묻는다. 이것은 단순한 음주의 행위가 아니라 감정과 본능, 해방의 선택이자 자기 해체의 의식이다. 술은 인간을 무장해제시키고 진짜 자신과 마주하게 만든다. 이는 쾌락을 넘어 신성과 접속하는 방식이며 디오니소스 숭배가 단순한 연회를 넘어 하나의 경계 체험으로 기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저승과 지상을 연결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머니 세멜레를 구하기 위해 직접 하계로 내려갔던 유일한 신 중 하나로 그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자로 인식된다. 그의 신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통과해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믿음을 갖는다. 이것은 디오니소스가 단순한 쾌락과 감정의 신을 넘어 순환과 재생의 신,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심연을 건드리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결국 디오니소스의 다양한 별칭과 상징들은 하나의 결론을 향한다. 그는 분열된 존재다. 감정과 이성, 죽음과 삶, 신성과 인간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그 경계에서 균형을 잡지 않고 흔들리는 존재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예술과 철학, 종교와 신화에서 다시 불려오며 해석되고 또 해석된다. 이처럼 예술의 언어로 해석된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술의 신이 아니라 인간 감정과 존재의 본질을 묻는 존재다. 그런데 그가 인간에게 요구한 것은 단지 감정의 해방이 아니었다. 그가 진짜로 원했던 건 믿음이었다.




고찰2 - 믿음을 강요한 신의 원형




디오니소스는 이상한 신이다. 술의 신이지만 단순한 주신(酒神)이 아니고, 죽음과 부활의 신이지만 지하세계의 지배자도 아니며, 여장을 하고 인간에게 광기를 퍼뜨리지만 예술과 해방의 신이라 불린다. 문제는 이 모든 이미지가 조화롭게 하나의 캐릭터로 결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오니소스를 생각할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신인가? 아니면 신이 되고 싶은 존재인가?



디오니소스는 신에게 요구되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보인다. 끊임없이 자신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테바이 왕 펜테우스가 그를 신으로 믿지 않자, 그는 펜테우스를 미치게 만들어 마이나데스들의 손에 찢어 죽게 만든다. 나를 믿지 않으면 너희 공동체는 파멸한다는 이 구조는 단지 개인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응징이다. 믿음을 거부한 도시 테바이는 그 대가로 공동체적 광기와 몰락을 겪는다. 이 장면에서 디오니소스는 더 이상 인간의 본능을 대변하는 해방의 신이 아니라 믿음을 강요하는 사이비 교주처럼 느껴진다.



놀라운 건 이 구조가 전혀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성경, 특히 구약의 신도 유사한 방식을 보인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일신론의 명령, 불순종한 민족에게 내리는 재앙과 유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던 절대자의 시험. 모든 것이 믿음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다만 차이점은 정제의 유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윤리와 계약의 언어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며,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감정적이고 직설적이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미치게 만들고 죽게 만든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믿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는 구약의 신과 닮았지만 그 방식은 훨씬 날것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상상이 가능해진다. 혹시 윤리적이고 체계화된 일신론적 신의 개념은 디오니소스 같은 존재의 반면교사로서 정리된 결과물은 아닐까? 디오니소스는 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신이라는 자격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한다.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곧 스스로 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존감이 충만한 존재는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도 신임을 강요하고 그 증거로 광기와 파괴를 쏟아붓는다. 이 모든 것들이 오히려 디오니소스가 진짜 신이 아니라 신이라는 자리를 얻고자 한 존재였다는 방증이 된다.



더 나아가 보면 이 믿음 구조는 공동체 통제의 서사로 이어진다. 믿음을 거부하는 자는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심지어 파멸당한다. 신은 자존감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지배하게 된다. 이는 곧 믿음이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복종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시작에 디오니소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술의 신이 아니라 믿음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관계의 원형을 보여준다. 믿음을 얻기 위해 광기를 이용하고 거부를 처벌하며 존재의 정당성을 끝없이 증명해야 했던 신. 자존감 제로의 신. 인간에게 해방을 약속하면서도 자신은 해방되지 못한 존재.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누구보다 위험한 신이다.




결론




결국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술의 신이 아니다. 그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며 끊임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다. 믿음을 요구하면서도 그 믿음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존재 자신을 신이라 부르지만 스스로 그 신성에 확신이 없어 보이는 존재. 그는 광기와 예술, 해방과 통제, 쾌락과 공포가 뒤섞인 신이다. 이처럼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신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 안에서 너무 많은 인간적인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신이면서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이고 그 불안정한 자아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외면할 수 없고 동시에 경계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는 우리 안의 신이면서 우리 안의 혼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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