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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이후 2.0 버전 인간

by 야담

1. 신화 이야기




태초의 세상은 황금시대였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다스리는 시대는 평화와 조화가 가득했으나, 그가 타르타로스에 갇히면서 시대는 점차 타락하여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마지막으로 철의 시대로 이어진다. 인간은 점점 더 탐욕스럽고 폭력적으로 변하며 신들의 분노를 산다.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인간 세상에 실망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그녀는 별자리가 되어 하늘에서 내려다본다. 그녀 자신은 Virgo(처녀자리)로, 그녀의 상징인 저울은 Libra(천칭자리)로.



이러한 시대에 아르카디아의 왕 리카온은 제우스를 시험하기 위해 신(이름 없는 소년)을 죽이고 요리하려 한다. 그는 인간의 탈을 쓴 야수였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인간을 모두 쓸어버리기로 결정한다. 남풍 노토스와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강의 신들이 모두 힘을 합쳐 지구를 물로 뒤덮는다. 신들의 심판이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해는 모습을 감춘다. 밤과 낮의 경계가 사라지고 바다는 대지를 삼킨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이 파도처럼 무너진다. 그러나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온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는 제우스의 자비를 입는다. 신들은 북풍 보레아스를 시켜 비를 걷어내고 동풍 에우로스를 보내 안개를 걷게 한다. 포세이돈은 트리톤의 나팔을 울려 물을 거두게 한다. 물이 빠진 후 세상에 남은 것은 단 두 사람, 데우칼리온과 피라 뿐이었다.



이들은 절망 속에서 기도하고 신탁을 받은 이치의 여신 테미스는 그들에게 어머니의 뼈를 던지라고 말한다. 그 어머니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이며 뼈는 돌을 상징한다. 이들은 머리를 가리고 옷의 띠를 푼 채 돌을 어깨너머로 던진다. 그 돌은 남자와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 무생물이 생물로 바뀌는 기적, 돌의 베인(결)이 혈관의 베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다시 인류는 시작된다.




2. 신화와 문학




대홍수 이야기는 단순히 자연재해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이 신화는 도덕적 붕괴와 신의 심판, 그리고 정화와 재창조의 순환을 담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수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서도 반복된다.



성경의 노아 이야기 역시 인간의 타락, 신의 분노, 의인의 선택과 구원,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라는 주제로 구성된다. 이 구조는 톨스토이의 부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처럼 타락과 구원, 파멸과 회복을 다룬 이야기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현대의 재난 영화들 속에서도 이 신화의 파편이 반복된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노아나 대홍수 이후 재건된 세계를 다룬 디스토피아 문학은 모두 데우칼리온 신화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SF 장르에서도 이러한 주제는 새로운 행성을 향해 떠나는 이야기로 전환되어 신의 심판 대신 인류의 책임이라는 윤리적 주제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인터스텔라에서는 지구의 환경이 더 이상 인류를 수용하지 못하게 되자 일부 인물이 새로운 땅을 찾아 우주로 떠난다. 이는 홍수 후 새 대륙을 찾는 구조의 현대적 비유다. 정화와 재시작, 도덕적 결단이라는 메시지가 그대로 이어진다. 이처럼 대홍수 신화는 장르를 넘나들며 반복되고 변주된다.



문학 속에서도 유사한 구조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플랜더스의 개에서 네로와 파트라슈는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사랑은 마지막에 신성한 승화로 연결된다. 어린 왕자에서는 별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신이 버려둔 장미와 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며,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에서는 통제와 억압이 결국 인간성을 파괴하면서도 희망이라는 불씨가 사라지지 않음을 강조한다. 대홍수 신화는 이 모든 문학의 기저에서 흐르며 정화와 재시작이라는 근원적 내러티브를 제공한다.




3. 세계의 대홍수 신화들



이야기의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성경의 노아는 신의 지시에 따라 방주를 짓고 동물들을 한 쌍씩 태운다. 인간의 죄로 세상은 물에 잠기고 40일 동안 쏟아지는 비 속에서도 노아는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다.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진 뒤 그는 땅에 내려 제사를 드리고 신은 무지개를 보내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수메르 신화 속 우트나피쉬팀 역시 신 에아의 계시를 받아 거대한 배를 만든다. 6일 낮, 6일 밤 동안 비가 내리고 7일째가 되자 세상은 고요해진다. 그는 살아남은 대가로 신에게서 불사의 존재가 된다. 이 이야기는 길가메시 서사시 속에서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 길가메시에게 전해지며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새롭게 성찰하게 한다.



인도 신화에서는 마누가 주인공이다. 어느 날 강가에서 작은 물고기를 발견해 기르고 돌보는데 이 물고기는 사실 비슈누의 화신이다. 비슈누는 곧 대홍수가 올 것이라 경고하고 마누는 그에 따라 배를 지어 동물과 식물의 종자를 모은다. 물고기 형태의 신이 배를 히말라야까지 인도하고 물이 빠진 뒤 마누는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다.



아즈텍 신화에서는 태양의 시대가 끝날 때마다 세상이 멸망한다고 믿었다. 네 번째 태양 시대의 종말은 대홍수로 찾아온다. 선량한 부부 타타와 네나는 신의 계시로 거대한 나무속에 숨어 살아남는다. 마야 신화에서는 진흙 인간과 나무 인간이 창조되지만 신을 경배하지 않자 모두 홍수로 쓸려나가고 그 후 옥수수 인간이 탄생한다. 물은 실패한 창조를 지우고 더 나은 창조를 위한 리셋 버튼처럼 작용한다.



북미 오지브웨이 전설에서는 단 한 명의 인간이 살아남고 땅을 되살리는 일은 동물들이 함께한다. 두더지가 깊은 물속에서 흙을 가져오고 거북이의 등 위에 그 흙을 뿌려 새로운 대지를 만든다. 하와이 전설에서도 누우라는 선량한 인물이 거대한 카누를 만들어 동물들과 함께 살아남는다.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들, 예를 들어 콩고의 부시족, 나이지리아의 요루바족 전설에서도 인간의 죄와 신의 분노, 그리고 의로운 소수의 생존과 재건 이야기가 반복된다.



중국 고대 설화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홍수를 다룬다. 곤이 실패한 후 그의 아들 우는 물을 막는 것이 아니라 흐르게 한다. 그는 물길을 만들고, 운하를 내고, 강이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치수를 완수한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라의 시조가 되고, 치수의 왕으로 기억된다. 이 이야기에서 물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되묻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러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지역과 문화는 다르지만 핵심 구조는 공유한다. 인간의 타락, 신의 분노, 대홍수, 소수의 생존자, 그리고 새로운 시작. 물은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재앙이 아니라, 정화와 갱신, 회복과 재구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신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처럼 반복되는 대홍수 서사는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자연재해의 기억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토록 다양한 지역에서 비슷한 신화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4. 고찰




이처럼 반복되는 대홍수 서사는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단지 상상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실제 재난의 기억일까?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지역과 시기의 차이가 크고 이야기도 각자의 색채를 분명히 지닌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과학적 가설을 제시해 왔다.



첫 번째로, 약 1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 이후 빙하가 녹으며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했고 전 세계적으로 강과 바닷가 근처에서 홍수가 반복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반복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었고 그 경험은 세대에서 세대로 구전되다가 신화로 정착되었을 수 있다.



또한 기원전 5600년경 흑해에서 실제로 거대한 침수가 있었다는 흑해 홍수설은 지중해의 바닷물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뚫고 흑해로 유입되면서 수십만 제곱킬로미터의 육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이론이다. 이 사건이 메소포타미아나 유럽 일대의 집단기억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역에서 발견된 2미터 이상의 진흙 퇴적층은 단기간에 벌어진 대규모 홍수를 증명하는 물증으로 여겨진다. 이 외에도 지질학적으로 많은 지역에서 같은 시기 대규모 수해 흔적이 발견되며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 일대에서도 비슷한 기록과 지형 변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자료들은 실제 자연재해가 집단기억에 남아 각 지역의 환경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사화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전 세계의 홍수 신화는 단일한 원형에서 파생되었다기보다 공통된 재난을 각자 자기 식으로 이야기로 엮어낸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학적 설명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야기의 구조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생존자들이 대부분 윤리적으로 올바른 자라는 설정은 단지 자연재해의 기억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는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붕괴에 대한 공포와 회복의 희망이 이야기로 형상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대홍수 이야기는 인간이 감당하지 못한 욕망과 이기심의 결과로 문명 전체가 리셋되는 극적인 장치를 제공한다. 이는 단지 고대의 신화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류는 지금도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문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데우칼리온과 피라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다시 인류를 창조했다는 점이다. 신은 심판까지는 하지만 다시 세우는 역할은 남겨둔다. 돌을 던진다는 행위는 단지 생명의 재창조가 아니라 무생물에서 생물로의 전환이라는 창조 행위이며 동시에 신탁을 따르는 지혜와 신중함의 상징이다. 즉, 홍수는 자연의 파괴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또한 데우칼리온 신화는 의인 한 쌍만이 살아남는 구조를 택한다. 이는 단체의 구원이 아닌 개인의 도덕성에 따라 세상이 재구성된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는다. 많은 대홍수 신화들이 이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의 인간들이 도덕적 기준과 행위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신화가 던지는 근본 질문은 단 하나다. 인간은 과연 변화할 수 있는가? 물은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게 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전과는 다른 윤리와 공동체를 세울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시작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은 끝없이 반복하는 동시에 끝없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창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재창조임을 말한다. 처음 세상을 만든 것은 신이지만 무너진 세계를 다시 세우는 것은 인간이다.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던진 돌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무게, 죽음과 폐허의 기억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는 힘을 상징한다. 이 신화는 단순한 재난극이 아니라 인간이 윤리를 통해 문명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서사다.



오늘날의 기술 문명에서도 이 신화는 유효하다.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생명공학, 우주 이주 등 인간은 창조의 영역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인간성은 더욱 시험받는다. 정화 없는 진보, 도덕 없는 기술은 제2, 제3의 홍수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데우칼리온 신화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윤리적 딜레마를 조명하는 이야기로 다시 읽혀야 한다.



더 나아가 이 신화는 회복력이라는 개념과도 깊이 닿아 있다. 인간은 파괴되었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가? 단지 생존을 넘어 더 나은 방향으로의 전환은 가능한가? 데우칼리온은 단순히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야 했던 인물이었다. 재난 이후의 세계를 다시 짜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의 몫이며 이 과정에는 책임과 윤리, 그리고 상상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면에서 대홍수 신화는 기후 위기, 팬데믹, 기술 윤리 문제 등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지닌다.



이 신화를 반복해서 읽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잊지 않기 위해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홍수가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떤 돌을 어깨너머로 던질지를 미리 고민해 보기 위해서.




5. 결론




데우칼리온과 피라의 이야기는 단지 신화로서 흥미로운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 재난 이후의 회복 가능성, 그리고 재창조의 힘을 상징하는 이야기다. 이 신화는 오히려 과거의 경고라기보다 미래를 위한 설계도처럼 느껴진다. 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철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환경 파괴와 전쟁, 불평등과 오만 속에서 인간성은 또다시 시험받고 있다. 신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돌을 던질 준비가 되었는가? 당신은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이 오래된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를 흔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다음 이야기를 시작할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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