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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아버지

by 야담

신화 이야기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은 뱀 피톤을 죽이면서 델포이의 신탁을 차지하고 예언의 신이 된다. 피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신탁을 지키던 존재로 레토를 괴롭혔던 죄로 죽임을 당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라 예언권의 전복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뜻하며 이후 아폴론은 델포이에서 자신의 신탁을 세우게 된다. 피톤의 아내 피티아는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가 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피티아 경기까지 열리게 된다. 뱀은 이로써 예언과 신의 권능을 잇는 존재가 되었다.



멜람포스는 인간 예언자로 뱀과의 접촉을 통해 신비로운 능력을 얻게 된다. 그는 하인들이 죽인 뱀의 새끼를 거두어 키웠고 자라난 뱀이 그의 귀를 핥아주며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이 능력으로 그는 미쳐버린 왕의 딸들을 치유하고 예언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뱀은 여기서 동물과 인간, 신적 세계를 연결하는 감각의 매개자이자 치유의 문을 여는 존재로 그려진다.



폴리이도스는 크레타 왕 미노스의 아들 글라우코스를 부활시키는 인물이다. 글라우코스는 장난을 치다 꿀단지에 빠져 죽었고 폴리이도스는 이를 찾지만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왕실의 돌무덤에 갇힌다. 이때 등장한 얼룩 뱀이 해독 약초로 다른 뱀을 살리는 장면을 본 폴리이도스는 그 약초를 사용해 글라우코스를 되살린다. 하지만 미노스는 그에게 예언의 능력을 글라우코스에게도 전수하라고 명령하고 폴리이도스는 가르친 후 떠나기 직전 아이에게 침을 뱉게 하여 모든 능력을 회수해 버린다. 이 이야기는 뱀을 통해 부활의 기술과 예언의 지식을 획득하는 동시에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신성한 지식의 본질을 드러낸다.



아폴론의 또 다른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그는 켄타우로스 케이론에게 의술을 배우며 뱀이 약초를 물어 치료하는 장면을 통해 치유의 비법을 익힌다. 그의 지팡이에 감긴 뱀은 오늘날까지 의료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 지팡이는 흔히 두 마리 뱀이 감긴 카두케우스의 지팡이와 혼동되지만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단 하나의 뱀이 감긴 형태로 의술과 치유의 상징이다. 오늘은 카두케우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이 글의 핵심은 아스클레피오스와 그의 지팡이에 담긴 상징성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WHO나 약국의 로고에 사용되는 이 뱀의 형상은 고대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을 살려내어 죽음의 질서를 위협했고 결국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죽는다. 이는 치유와 생명의 힘이 신의 질서 위반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인물은 테이레시아스다. 그는 숲에서 교미 중인 두 마리의 뱀을 지팡이로 쳤다가 여성으로 변하고, 몇 년 후 다시 같은 방식으로 남성으로 돌아온다. 이 경험 덕분에 제우스와 헤라가 성적 쾌감에 대해 논쟁하자 그는 남녀의 입장을 모두 경험한 자로서 증인이 된다. 뱀은 여기서 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존재로 인간 정체성과 감각의 본질을 흔드는 힘을 상징한다. 단순히 성전환의 신기함을 넘어서 뱀은 인간의 인식 구조와 성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존재로 등장한다.




2. 신화와 문학




신화는 단지 오래된 이야기이기보다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혜와 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특히 아폴론과 피톤, 아스클레피오스, 폴리이도스와 같은 이야기들은 예언, 부활, 지식의 경계, 뱀이라는 상징을 통해 지금도 다양한 문학 속에서 변주되고 있다.



예언과 질서, 죽음 위에 선 목소리를 그린 T.S. 엘리엇의 황무지는 피톤을 죽이고 델포이를 차지한 아폴론의 서사처럼 죽음을 전제한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다룬다. 말라가는 대지, 침묵 속 예언, 부서진 문명의 한가운데서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피톤의 죽음은 신탁의 공간을 열었지만 동시에 원초적 힘을 죽이는 행위였다. 엘리엇의 문장들은 마치 그 장면의 메아리처럼 메말라 있다. 예언은 누군가의 침묵 위에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아폴론은 황무지의 첫 번째 등장인물일지도 모른다.



죽음과 부활, 꿈과 현실을 그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원형의 폐허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자가 결국 자신도 환상 속 존재임을 깨닫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는 글라우코스를 살린 폴리이도스를 닮았다. 얼룩 뱀의 약초가 글라우코스를 살렸듯 주인공은 꿈속에서 인간을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그 과정 끝에 마주한 것은 창조자의 무력함이다. 부활은 신의 영역일지 몰라도 인간은 끝끝내 거기서 깨어날 수 없는 꿈을 꿀 뿐이다.



초지능, 신의 한계를 그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 이해는 아스클레피오스를 가장 현대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약물로 초지능을 얻은 주인공은 곧 삶과 죽음, 인간과 신의 구분마저 넘어서려 하지만 결국 자신보다 더 강력한 존재와 충돌하게 된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죽은 자를 살리고자 했을 때 제우스의 벼락이 그를 멈췄듯이. 이 이야기에서 치유는 신의 허락이 없으면 넘을 수 없는 금기이자 파멸의 출발점이다.



신을 흉내 내는 인간을 그린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신의 영역을 흉내 내다 무너진 인간의 이야기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이라 믿으며 살인을 저지르지만 아무런 신탁도 없는 인간이 신처럼 행동할 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피톤을 죽인 것은 아폴론이었기에 질서가 되었지만 그저 한 인간의 칼은 범죄에 불과하다. 죄와 벌은 도덕과 초월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신화의 경계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살아 있는 신화, 오늘날 판타지로 가장 유명한 J.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현대 대중소설 속 신화적 상징의 보고다. 슬리데린의 뱀, 볼드모트의 부활, 뱀과 대화하는 능력, 예언된 아이, 생명을 담은 호크룩스는 아폴론의 예언,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술, 폴리이도스의 부활을 직·간접적으로 담아낸 현대적 재해석이다. 해리는 죽음을 넘어 돌아오고 볼드모트는 죽음을 조롱하며 부활을 시도한다. 그 속에서 뱀은 여전히 살아 있는 신화의 언어로 기능한다. 죽음을 넘어서려는 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 사이의 싸움은 결국 고대 신화와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각국의 신화




북유럽 신화에서는 로키의 자식 요르문간드가 세계의 바다를 감싸는 거대한 뱀으로 등장한다. 그는 신들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이며 세계 종말인 라그나로크가 도래할 때 토르와 숙명적인 전투를 벌인다. 이 뱀은 단순히 파괴의 존재가 아니라 균형과 순환의 메타포다. 바다를 휘감고 자신의 꼬리를 문다는 설정은 세계의 경계가 뱀의 몸이라는 뜻이며 이는 곧 우주적 질서의 순환을 상징한다. 요르문간드는 북유럽인들에게 자연과 세계, 신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균형을 시각화한 존재였다.



켈트 신화의 우로보로스는 꼬리를 물고 도는 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 뱀은 시작과 끝이 동일하며 생명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하나의 순환 구조 안에 있다는 세계관을 상징한다. 드루이드 교의 영향 아래에서 뱀은 지혜와 영속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으며 특정 전설에서는 이교도의 상징인 뱀을 죽인 자가 왕이 되기도 한다. 이는 뱀이 지닌 신비로움이 동시에 위협이었음을 시사하며 그것을 통제한다는 것이 질서의 상징이 되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태양신 라가 매일 밤 혼돈의 뱀 아페프(Apep)와 싸운다. 아페프는 거대한 어둠의 존재로 태양의 항해를 방해하며 밤마다 세계를 집어삼키려 한다. 그러나 매일 새벽 라는 이를 물리치고 다시 하늘로 떠오른다. 이 이야기에서 뱀은 혼돈과 어둠 그리고 반복되는 위기의 상징이며 이를 극복하는 태양은 질서와 생명의 상징이다. 이집트인들에게 뱀은 두려움이자 통제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을 이겨낸 태양신은 신권과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었다.



인도 신화에서 뱀은 나가(Nāga)로 불리며 반인반수의 신성한 존재로 여겨진다. 나가는 지하 세계의 수호자이자 물의 신령으로서 풍요와 생명의 상징이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을 때 비를 막아주며 보호한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힌두교에서는 비슈누의 잠자는 침상 역할을 하는 아난타 나가가 있는데 이는 우주의 바탕이 뱀이라는 사고를 보여준다. 뱀은 이처럼 인도에서 지혜와 보호 심지어 우주의 구조 자체를 형성하는 신성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에서는 뱀이 용으로 진화하여 신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용은 비와 바람, 번개를 다스리며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 전환은 뱀이 단순한 땅의 생물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또한 뱀은 음양오행 사상에서 물과 연관되며 자연의 기운을 다루는 신묘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징은 제왕의 권위와도 연결되어 뱀은 자연의 힘을 대변하면서도 정치적 질서의 정당화를 위한 상징이 되었다.



일본의 신화에는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인 뱀 야마타노 오로치가 등장한다. 이 거대한 뱀은 매년 한 명의 처녀를 잡아먹었는데 스사노오 신이 이를 퇴치한 뒤 오로치의 꼬리에서 전설적인 검, 쿠사나기노츠루기를 발견한다. 이 신화에서 뱀은 재앙이자 신성한 힘이 숨겨진 존재로 등장하며 무질서한 자연을 제압하고 그 속에서 문명의 도구를 획득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본의 뱀 신화는 자연을 경외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낸다.



남미 아즈텍 신화에서는 깃털 달린 뱀 케찰코아틀이 문명과 예술, 풍요를 다스리는 신으로 등장한다. 그는 인간에게 농경법을 가르치고 언어와 지식을 전파했으며 신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후기에는 전쟁신에게 밀려나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로 바뀌며 뱀의 이미지가 창조에서 파괴로 전환된다. 케찰코아틀은 이중적 상징의 극치를 보여주며 뱀이 인간 문화의 진보와 타락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서아프리카의 다하메이 신화에서는 뱀 단(Dan)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으며 그의 움직임이 지진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파괴로 해석되지 않고 세계의 균형이 유지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단은 하늘과 땅, 창조와 지속을 연결하는 신령한 매개체이며 이 지역에서 뱀은 항상 변화하지만 결코 무너뜨리지 않는 존재로 인식된다. 뱀이 움직인다는 것은 세계가 살아 있다는 뜻이며 뱀의 균형이 곧 우주의 균형이라는 사고는 매우 직관적인 자연철학으로 연결된다.




고찰




고대 그리스인들은 뱀이라는 하나의 동물에 죽음, 치유, 지혜, 재생, 예언, 순환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들을 동시에 담아냈다. 뱀은 단순한 상징의 대상이 아니라 모순과 통합이 공존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뱀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소리 없이 다가와 목숨을 앗아가고 그 독은 단번에 죽음을 불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은 의술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독과 약의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을 부르는 힘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생명을 되살리는 기술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독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죽음과 공포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독은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뱀은 바로 그 이중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동물이었다. 그 독은 생명을 끊는 동시에 적절한 용도와 조합에 따라 생명을 구하는 치료제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뱀은 파괴와 회복 위험과 치유라는 양면적 속성을 지닌 상징체였으며 이는 고대인들의 세계관과 의식 속에서 독과 약이라는 이중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핵심 매개체가 되었다.



뱀은 또한 허물을 벗음으로써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생물이다. 이는 죽고 다시 태어남이라는 상징을 부여받기에 가장 적합한 생물이었다. 죽음을 품은 채 생명을 다시 시작하는 존재. 이 이미지가 치유와 재생의 상징으로 연결된 것이다. 고대인들은 뱀의 탈피를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는 능력으로 보았다. 이는 단순히 병을 억제하는 약의 영역을 넘어서 몸 자체를 다시 살리는 외과적 치유의 비유로도 작동했다. 그래서 뱀은 약의 상징일 뿐 아니라 외과의 상징, 살려내는 의술의 총합으로 자리 잡았다.



뱀의 혀는 감각 기관이다. 후각과 미각, 방향 감지의 기능을 통합하여 주변의 기운을 감지하고 위험을 피하고 목표를 포착한다. 말은 없지만 주변의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읽는 생물이다. 이 말 없는 감각은 고대인들에게 예언의 이미지로 전이된다. 말하지 않고도 알고 있는 자, 말하지 않고도 앞을 내다보는 자. 그것이 바로 고대인이 뱀을 예언자로 인식한 시작점이다.



뱀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즉 침묵을 선택한 자의 태도였다. 고대인들에게 진짜 지혜는 많은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 없는 통찰로 드러났다. 예언자란 늘 조용히 진실을 꿰뚫어 보는 자였고 뱀은 그런 존재의 메타포였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생물인 뱀이 세상의 방향을 먼저 읽는다는 점은 그 자체로 신비였다. 그래서 뱀은 단순히 지혜롭다는 평가를 넘어서 예언한다' 고대적 상징으로 연결된 것이다.



언어는 감정의 도구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누군가가 말을 잘할수록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다고 여겼다. 그런데 뱀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혀를 날름이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감지한다. 그 모습은 마치 말하지 않고도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불어 신화 속 뱀들은 대개 유혹자 혹은 설득자였다. 아담과 하와의 사과를 떠올려도 뱀은 단 한마디 말로 세계를 바꾼 존재다. 말하지 않지만 말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서의 뱀. 이것이 지혜를 넘어 감정을 조종하는 지식의 상징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뱀은 과거의 상징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병원, 약국, 국제보건기구의 로고에 뱀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무심히 그 이미지를 지나치지만 그 안에는 죽음과 생명, 치유와 지혜를 넘나드는 수천 년의 상징적 계보가 들어 있다. 뱀이 여전히 의술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고대인들이 세운 그 인식의 구조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뜻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는 여전히 생과 사의 경계 앞에서 신화적 상상력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뱀은 단순한 생물이 아닌 우리 문화에 각인된 하나의 상징적 장치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뱀이라는 동물에 대하여 공포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생명과 지혜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뱀을 신으로 삼지 않았지만 뱀이 보여주는 감각과 조용한 통찰, 독의 통제, 허물 벗기의 반복 속에서 삶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뱀은 하나의 동물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은유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온갖 기술을 가진 현대인 못지않게 독과 약 죽음과 회복의 경계를 알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결론




뱀이라는 동물을 바라보는 고대인의 시선은 단순한 공포나 경외를 넘어서 생명과 죽음, 지혜와 무지, 치유와 파괴의 교차점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신화는 그 시도의 집합이며 뱀은 그 집합을 가로지르는 핵심 상징이다. 이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뱀은 신화와 문학, 전 세계 문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매번 다른 얼굴로 인간의 상상력에 도전한다. 그 상징의 유연함은 곧 인간 정신의 유연함을 반영한다. 우리는 뱀을 통해 결국 인간 자신을 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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