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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신의 자녀, 그 이름은 창조

by 야담

신화 이야기




무사이 아홉 여신은 제우스와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신들이다. 제우스는 하늘과 질서를 다스리는 신이며 므네모시네는 기억의 여신이다. 즉 이들의 결합은 세계의 질서가 기억과 전승, 곧 이야기와 기록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한 힘의 구조가 아닌 기억에 의한 통치, 기억에 의한 예술 창조, 기억에 의한 역사 형성의 상징이 무사이이다. 이들은 단순한 예술의 신이 아니라 신적인 영역의 질서와 영감을 인간의 언어와 예술, 사유의 차원으로 번역해주는 매개자다.



이 아홉 무사이들은 각각 특정한 영역의 예술 혹은 학문을 담당한다. 클레이오는 역사, 우라니아는 천문학, 멜포메네는 비극, 탈레이아는 희극, 테르프시코레는 춤, 폴리힘니아는 찬송가, 에라토는 연애시, 에우테르페는 서정시와 음악, 칼리오페는 서사시를 관장한다. 이들의 이름은 모두 어떤 상태나 감정, 가치에서 비롯되며 예술의 본질이 감각을 넘어서는 차원임을 상징한다.



한편 레테는 이들과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존재로 보인다. 레테는 망각의 여신이며 동시에 저승과 잠, 그리고 죽음을 통과하는 통로로서의 강, 물, 의자 등으로 형상화된다. 죽은 자는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생전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신탁을 받으러 온 자는 레테의 물을 마시고 자기 안의 혼란스러운 기억을 잠시 지운다. 피리토오스와 테세우스는 레테의 걸상에 앉음으로써 기억의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만다. 이렇듯 레테는 인간이 기존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잊음의 의식이다.



트로포니오스의 신탁 또한 망각과 기억이 교차하는 체험이다. 그는 신전에 들어가기 전 망각의 샘 레테의 물을 마신 후 다시 기억의 샘 므네모시네의 물을 마시고 명상을 통해 신비로운 계시를 받는다. 이 구조는 단지 상징적인 순서를 넘어 인간이 새로운 사유와 예술,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망각과 기억이라는 두 세계를 모두 통과해야 함을 시사한다. 아리스타이오스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 즉 에우리디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씻기 위해 신적 존재인 프로테우스에게 가야 하고 그는 프로테우스의 끊임없는 변신을 끈질기게 붙잡는 과정을 통해 결국 속죄와 재창조(꿀벌의 회복)를 이룬다. 이 역시 과거의 단절과 새로운 창조를 연결하는 상징이다.




신화와 문학




이 신화들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에 머물지 않고 문학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된다. 무사이 아홉 여신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에서 반어적으로 응용된다. 바벨의 도서관은 이미 모든 지식과 예술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거기서는 새로운 창조의 욕망조차 무의미해진다. 무사이가 본래 창조의 원천이라면 바벨의 도서관은 창조의 종말을 뜻한다. 기억과 기록이 과도하게 쌓일 때 창조는 오히려 불가능해진다는 통찰이다.



레테의 강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레테는 더 이상 신화적 강이 아니라 망각의 시스템이다. 기록을 조작하고, 과거를 삭제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만들어내는 전체주의 권력은 기억을 지움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장악한다. 이때의 망각은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이 아니라 강제되고 왜곡된 망각이다.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은 한국의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어두운 동굴, 환영, 깨달음, 물을 통한 의식 등이 반복된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적인 깨달음에는 현실의 망각과 초월적 기억이 함께 작동한다는 보편 구조를 보여준다. 아리스타이오스의 이야기 역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계승된다. 프로도가 절대 반지를 없애기 위해 수행하는 여정은 죄와 유혹을 견디는 시험이며 결국 새로운 세계의 재창조를 의미한다.




고찰 –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태어나는 창조성




무사이와 레테, 트로포니오스와 아리스타이오스는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신화로 보이지만 하나의 커다란 주제로 수렴된다. 바로 기억과 망각, 그리고 창조다. 고대 그리스 신화는 예술과 사유, 진리의 탄생을 단순한 천재성이나 신의 선물로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을 계승하고, 망각을 통과하며, 그 둘을 어떻게 융합하는가에 따라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무사이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자식이다. 즉 예술은 기억을 통해 태어난다. 그러나 단지 기억만으로는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지 않는다. 새로운 예술은 반드시 잊음이라는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트로포니오스 신탁에서 순례자가 먼저 레테의 샘물을 마시는 이유는 기존의 기억과 언어, 해석을 잠시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망각은 무지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식의 공간을 마련하는 여백이다. 기존의 질서와 기준, 기억이 사라질 때 비로소 새로운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 신화는 말한다. 창조는 기억의 계승이자 망각의 통과라고.



이러한 망각은 단순히 과거를 지우는 파괴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고와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인 상태다. 망각을 통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야만 인간은 더 깊은 자아, 더 새로운 사유, 더 낯선 감정과 접촉할 수 있다. 이는 예술이 단순히 앎의 축적이 아니라 알지 못함 속에서 태어난다는 역설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망각은 곧 텅 빈 상태이며 창조가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또한 이러한 망각은 영원한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위한 단절이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에우리디케를 직접적으로 되살릴 수는 없었지만 속죄를 통해 꿀벌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 구조는 창조가 죄의식과 망각, 즉 과거의 상처를 통과하면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망각은 과거와의 단절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관계 형성의 전제다. 마찬가지로 프로도가 반지의 유혹을 버티는 과정에서 그는 과거의 자아와 단절하고 새로운 세계의 희망을 준비한다.



망각은 비움이고 기억은 채움이다. 그러나 예술은 채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기술을 기억하더라도 거기에 질문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복제일 뿐이다. 예술은 어떻게보다 왜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왜를 묻기 위해선 잠시 모든 어떻게를 잊어야 한다. 망각은 바로 그 출발점이다. 질문 없는 창조는 없다. 잊어야만 질문이 생긴다. 질문이 생겨야 새로운 사유가 열린다.



망각과 기억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한다. 레테는 므네모시네와 함께 신탁의 관문에 존재하며 무사이들은 기억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에게는 영감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다. 무사이는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감을 제공하는 존재일 뿐이며 인간은 그 영감을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창조자로 자리매김한다. 이 점에서 예술은 인간의 능력인 동시에 신적인 순례이며 창조는 잊고 다시 기억하는 행위다.



그래서 진정한 창작자는 두 종류의 기억을 가진다. 하나는 잊지 않기 위한 기억, 다른 하나는 잊기 위한 기억이다. 전자는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게 하고 후자는 미래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이 두 기억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사유 안에서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무사이는 이런 양가적 구조의 은유다. 영감은 기억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은 늘 낯선 무언가를 향한 감각으로 열린다.



망각 없는 기억은 고통이며, 기억 없는 망각은 공허다. 둘은 예술과 삶의 양 날개처럼 작용한다. 기억은 역사와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망각은 새로움을 위한 여백을 마련한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인간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서사를 창조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는 그것을 신들의 이야기로, 의식으로, 예술로 반복해서 말해온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다. 신화가 반복적으로 말해주는 건 풍요의 뿔이 그랬듯이 무사이의 영감 또한 욕심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감사와 절제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신의 영역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기억과 망각 이 두 힘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조율을 통해 비로소 진짜 창조가 시작된다.




결론




우리는 무사이의 이름을 빌려 예술을 뮤즈라 부른다. 영감은 언젠가 오며 그것은 단순히 창작 욕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기억에서 태어나고 망각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된다. 트로포니오스의 동굴처럼 예술과 깨달음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잊는다는 것은 비워내는 것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 채우는 것이다. 그 둘이 만나는 경계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창조하며, 인간다움을 유지한다. 그리하여 무사이는 단지 예술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정신 구조를 반영하는 존재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창조적 사고를 이야기할 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므네모시네와 레테가 섞여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무엇을 기억해야 하며 무엇을 잊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예술과 사유의 가장 오래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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