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연인들, 플라톤과 제우스의 공동정범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질까? 왜 어떤 사람은 이성에게, 어떤 사람은 동성에게 강하게 끌릴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플라톤은 신화를 꺼낸다. 이야기는 기묘한 고대 거인족으로부터 시작된다.
태초의 인간은 얼굴 두 개, 팔 네 개, 다리 네 개를 가진 거인족이었다. 이들의 성은 남성, 여성, 양성의 세 가지로 나뉘었고, 힘과 야망이 지나쳐 신들을 위협했다. 이에 제우스는 이들을 반으로 갈라 힘을 약화시키고 제물을 바칠 인간의 수를 늘렸다. 이후 인간은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자 애쓰게 되었고, 갈라진 성별에 따라 동성이나 이성에게 끌리는 성향이 나타났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설명한 인간 사랑의 기원이다.
오누이 관계를 중심으로 한 비도덕적 사랑은 단지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필리파 그레고리의 천일의 앤은 바로 그 상징적 금기를 문학으로 재현한 대표적 사례다. 앤 불린은 헨리 8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채 불안정한 왕권의 희생양이 된다. 작가는 이 상황에서 앤이 오빠 조지 불린과 금지된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를 문학적 장치로 삼는다. 책은 이 금기가 실제보다도 상징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비의 무력감, 여성의 재생산 압박, 권력 유지를 위한 금기의 파괴가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라 신화적 원형의 반복이다. 금기를 넘는 사랑은 반드시 파멸로 끝난다. 마치 오이디푸스가 모르는 사이 어머니와 결혼하고 비극을 맞는 것처럼 앤과 조지 역시 권력의 프레임 속에서 신화화된다. 천일의 앤은 신화의 플롯을 현대의 역사적 맥락에 이식한 결과이며 독자에게는 도덕 판단이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금기를 만들고, 왜 그것을 넘어서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처럼 오누이의 결합은 전 세계 다양한 신화와 설화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현대 윤리 기준으로 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대인들은 이러한 서사를 통해 인간 존재의 기원과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려 했다.
먼저 북유럽 신화, 특히 에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리프와 리프트라시르라는 오누이 등장인물이 있다. 이들은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라그나로크가 끝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다. 거대한 전쟁과 재앙으로 신과 세계가 모두 사라졌지만 이 오누이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뿌리 아래 숨어 살아남는다. 이후 이 둘이 새로운 인류의 시초가 되어 세상을 다시 번성시킨다. 여기서 오누이는 단지 가족이 아닌 인류 생존의 마지막 한 쌍으로 상징되며 세계의 재시작을 위한 기본 단위로 여겨진다.
잉카 신화에서도 흥미로운 오누이 서사가 등장한다. 잉카 문명의 시조로 알려진 만코 카팍과 마마 오클로는 태양신 인티의 자녀로 오누이이자 부부다. 인티는 그들에게 황금 지팡이를 주며 지팡이가 땅에 박히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해서 세운 곳이 바로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다. 이들은 단순한 창조자나 통치자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직접 임무를 부여받고 땅을 개척한 문명의 전달자로 여겨진다. 이 경우 오누이의 결합은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 신성한 혈통의 유지와 대지 개척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신화, 특히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남매신 티아마트와 압주가 중심 인물이다. 압주는 단순히 바닷물, 티아마트는 짠 바닷물 또는 혼돈의 여신으로 이해된다. 이 둘은 세상의 모든 신들의 조상이자 최초의 존재로 이들의 결합에서 바람, 물, 땅 등의 자연적 힘을 지닌 신들이 태어난다. 결국 후손 신들이 부모 신을 죽이고 세계 질서를 새로 세우는 구조로 이어지는데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가 혼돈에서 질서로의 이행을 신화적으로 해석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오누이 결합은 이 신화에서 혼돈의 생명력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이후의 창조와 질서로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한국 신화에서도 오누이의 상징성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설화 오누이의 재회다. 여기서 오누이는 홍수로 인해 헤어졌다가 서로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자신을 알리기 위해 수망과 암망을 돌린다. 여기서 수망은 맷돌의 수컷 부분 암망은 암컷 부분으로 각각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즉, 이 재회의 행위는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라 생식과 번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중에 깨진 거울을 들고 서로를 확인하는 장면은 오늘날 파경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현대의 이혼과는 정반대로 원래는 두 반쪽이 다시 맞닿아 하나가 되는 의미였던 셈이다.
이처럼 세계의 다양한 신화 속에서 오누이의 결합은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화적 상상력의 핵심 구조이자 인류가 자신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본질적인 서사 장치였다. 혈연적 유사성은 곧 기원의 동일성을 뜻하며 이는 창조의 정당성과 자연성과 깊게 연결된다. 문명마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가까운 두 존재의 결합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된다는 점은 거의 모든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 코드다.
신화 속 비윤리적 관계는 인간의 윤리 개념이 미숙해서 발생한 문화적 유산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개념을 이해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 곧 추상적 개념을 유형화하여 설명하려는 문명 초기의 해석 체계다. 신은 단순히 인간의 모습을 한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념의 의인화다. 사랑(아프로디테), 전쟁(아레스), 풍요(데메테르), 대지(가이아), 질서(제우스), 시간(크로노스) 등은 모두 형상이 없는 개념이었다.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신들의 관계를 이야기로 풀었다.
이처럼 신화는 개념과 개념의 만남을 사건으로 구성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화에서 보는 성관계는 실은 사랑과 질서, 풍요와 대지 같은 개념 간의 조합이다. 데메테르가 대지에 곡식을 내게 했다는 묘사는 풍요(데메테르)와 대지(가이아)의 결합을 말한다. 그것이 서사 구조상 결혼 혹은 성관계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만 신화의 문법에서 그것은 상징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오누이의 관계일까? 인간 사회에서 오누이는 가장 가까운 혈연이자 동일한 기원을 공유한 존재다. 이는 개념적으로 볼 때 하나에서 둘로 분리된 것들의 비유다. 앞서 플라톤이 설명한 태초의 인간처럼 모든 존재는 원래 하나였다. 그 하나가 둘이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그것을 원상복귀시키려는 욕망을 갖는다. 오누이의 결합은 실은 분리되었던 하나됨의 복원을 상징한다.
이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신화에서 반복된다. 리프와 리프트라시르, 만코 카팍과 마마 오클로, 티아마트와 압주 모두 그 시작점은 하나이고 그 하나는 다시 둘로 나뉘며 세계를 만든다. 인간은 이처럼 나뉘어졌다는 불안과 그리움을 갖고 살며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회복하려 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잃어버린 반쪽은 실은 하나였던 세계의 기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신화가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을 해석하는 기호 체계라는 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관계를 금기시하면서도 신화에서는 그 관계를 통해 세계의 기원을 설명한다. 현실에서는 오누이 간의 사랑이 윤리적 붕괴를 의미하지만 신화에서는 그것이 창조와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원형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다. 윤리를 세우면서도 그 윤리 바깥의 세계를 끊임없이 상상한다.
신화는 그 상상력을 제도화한 첫 번째 언어다. 철학이 논리로 세계를 해석하려 했다면 신화는 서사와 상징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그 서사 속에서는 윤리의 기준이 아니라 상징의 언어가 지배한다. 그렇기에 신화 속 사랑은 현실의 사랑과 다르다. 그것은 근원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이고 존재의 기원을 가시화한 문법이다. 그러므로 신화 속 비도덕성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구조다. 그것이 신화의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했는지 어떤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의 집합체다.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관계 또한 자연의 원리와 인간의 욕망, 감정, 충동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신화는 세계의 구조와 인간의 내면을 동시에 꿰뚫는다. 혼돈에서 질서를 낳고 질서 속에서 다시 혼란이 태어나는 원형적 순환을 반복하며 인간 존재의 모순을 포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를 통해 인간이 누구인지, 무엇을 갈망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신화는 인간이 만든 최초의 해석 도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해석의 언어다.
신화는 결국,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끝없이 되물었던 첫 번째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