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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담 Nov 11. 2024

내가 내가 아닌 세상에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을 보면서 며칠 동안 우울함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건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며 이를 인간의 접목하면 괴상한 의문점이 하나 떠오른다. 바로 테세우스의 배가 테세우스의 배인가라는 질문에서 내가 나인가라는 질문으로. 그러면 왜 이런 질문이 떠올랐는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보자.




1. 길가메시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우르크 : 현재 이라크)를 지배한 수메르 왕 길가메시에 대한 이야기며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인 길가메시가 친구인 엔키두와 삼나무 숲 속(현재 이란으로 추정)의 왕 훔바바를 무찌르러 길을 나선다. 계획대로 훔바바를 무찔렀지만 이에 신들이 노하게 되고 그 벌로 엔키두를 죽인다. 이에 길가메시는 자신도 언젠가 죽으리라는 두려움에 떨게 되고 영원히 살기 위하여 신에게 요청한다. 신은 기회를 주지만 결국 길가메시는 영생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2.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미디어에서 다루어 익히 아는 내용이지만 짧게 언급하자면 프랑켄슈타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들어낸 과학자이다. 그가 괴물을 만든 방법은 시체와 갖가지 요소에 전기적 자극을 주어 만든다. 쉽게 말하자면 짜깁기로 생명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3. 테세우스의 배 역설



테세우스의 배는 도둑을 때려잡는 무기로 쓸 수 있을 정도의 두께를 가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온다. 테세우스는 이런저런 모험을 한 후 마지막 세이렌의 함정을 무사히 넘기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목조로 만들어진 배를 장기간 보관하기 위하여 뼈대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교체한다. 내부를 모두 바꾼 것을 과연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각종 토론이 벌어진다. 이를 두고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라고 한다.




4. 고찰의 시간




이 내용을 토대로 사피엔스를 살펴보자면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이기에 영생을 꿈꾼다. 그것도 병들거나 늙지 않은 채로. 이를 위하여 어떤 약을 먹거나 주사로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신체 부품을 교체하는 방법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는 이것을 두고 영생을 원하는 길가메시와 여러 가지를 기워서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섞어 길가메시의 목말을 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했다.




즉, 영생을 목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몸을 짜깁기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직 진행 중이긴 하지만 이미 줄기세포로 신체의 일부를 만드는 것은 행해지고 있다. 윤리적인 문제로 인하여 특정한 상황에서만 인정되고 있지만, 실제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창백한 푸른 점에서 인간의 손끝이 미치지 않는 어딘가에서 비밀 병기를 위하여 이미 행해지고 있는지도.




이런 식의 영생은 테세우스의 배를 장기간 보관하기 위하여 뼈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교체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자, 그럼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당신은 현재 팔다리에 힘이 빠져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가 영생을 위하여 신체를 하나씩 교체한다. 물론 부작용에 관한 부분은 없다고 가정한다. 테세우스의 배가 뼈대를 내버려 둔 것처럼 우리 인간은 DNA에 관한 뼈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교체해야 영생에 이를 수 있다. 




그것도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재교체를 해야 하고. 이런 방법으로 당신은 영원히 20대의 몸으로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자, 이때 기억은 남아 있으니 그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주장할 수 있겠는가? 같은 DNA지만 묘하게 1그램의 망설임도 없이 주장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래 좋다. 적당히 뻔뻔하게 굴어서 이 신체가 자신의 것이라고 하자. 그럼 현재 개발 중인 AI 기억 이식이 완벽해지는 날엔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일단 조금 더 자극적인 느낌을 갖기 위하여 기억 복제부터 생각해 보자. 나와 동일한 DNA를 가지고 똑같이 생긴 인간에게 나의 기억이 복제되었다고 가정하면 도대체 어느 것이 나일까? 원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애가 나일까? 그러면 복제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쪽은 자신이 복제되었다고 인정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그도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하나의 생명체인데? 현재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면 이런 상황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영생을 위한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탄 프랑켄슈타인 박사 프로젝트는 별들만 깨어 있는 이 시간에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겉으로는 빠른 영생의 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는 날을 하루속히 우리 앞에 데려다 놓기 위하여. 이쯤 되면 인간 복제라는 단어보다 인간 생산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평소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읽던 책이나 기사들에서 우리는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하여 한 번씩은 깊게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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