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다. 받은 주제 중에 가장 까마득하다. 이렇게 쓰다가 다 지우고, 또다시 쓰다가 그대로 지워버린 주제는 없었다. 평소라면 마감시간이 임박하면 갑자기 번뜩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라 술술 써지기도 했는데 이번엔 다르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자꾸만 멍해진다. 자꾸만 쓰다가 지우게 된다.
쓰고 싶은 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주부의 애매하고 쓸모없는 버둥버둥 성장기를 써보고 싶다. 의욕에 넘쳐 직진만 하느라 별 성과 없이 살아온 인생을 궁금해할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책에 의존하며 소신 있게 키우려다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 하는 육아기는 어떤가. 나라도 안 읽을 것 같다. 책을 쓸 게 아니고 공책에 쓰면서 스스로 반성하면 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터놓고 알리고 싶다면 브런치나 맘카페에 털어놓을 수 있겠다. 현 상황에서 좋은 점을 찾고 걱정을 덜거나 잊어버리면서 즐겁게 사는 법을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책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정확한 방법을 제시하거나 근거를 댈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그런 성격 탓인 것 같다. 생각해 볼수록 답이 없다. 이쪽인가 싶어 갔더니 길이 막혀있고, 저쪽인가 싶어 갔더니 뚜껑 없는 맨홀에 빠져버렸다. 과연 내가 쓸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책을 쓰는 비책이 지금 내게는 필요하다. 아직은 책을 쓸 때가 아니고 책을 살 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