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향기 Nov 06. 2023

국물이 당기는 날

엄마가 그리워지는 날입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더니 퇴근길에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에어컨을 켜고 운전을 했는데 오늘은 자동차 시트에 히터를 켜고 퇴근했다. 운전을 하고 출퇴근을 하기에 외투를 입으면 번거로워서 지금껏 안 입고 버텨왔는데 내일부터는 아무래도 외투를 입고 출근해야 할 것 같다. 언제 더웠냐는 듯이 말이다.


이런 날씨에 간절해지는 건 따끈한 국물이다. 국물 한 스푼을 넘어 목을 넘기는 순간 몸 전체가 스르르 따뜻해지는 그 맛이 그리워진다. 다이어트를 할 때는 가능하면 국물을 먹지 말아야 하는데 추운 계절이 찾아오니 참아내기 힘들다. 국 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건 친정 엄마표 국이다. 지난 추석 때 엄마표 국을 양껏 많이 먹고 왔는데도 그새 그립다.


어릴 적 우리 집 부엌에는 늘 국이 있었다.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직접 살림을 해보니 가스레인지 위에 늘 국이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 어릴 때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어느새 일어나셔서 국과 반찬을 뚝딱 만들고 계셨다. 늦게 일어나면 하루가 금세 저문다고 말씀하셨는데 마흔이 넘어서야 그 말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집 밥상에 가장 많이 오르던 엄마표 국은 배추 된장국이었다. 커다란 멸치를 달인 국물에 집 된장을 풀어서 텃밭에서 갓 캐온 배추를 슴덩슴덩 썰어서 팔팔 끓여 낸 국을 자주 먹었다. 마트에서 파는 된장보다 진하고 깊은 맛에 배추의 쌉싸름함이 더해져 구수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났다. 밥과 말아먹어도 좋고 김치와 함께 먹어도 썩 잘 어울렸다.


배추 된장국 다음으로 많이 먹었던 건 김치찌개이다. 엄마는 직접 담그신 묵은지를 썰지 않고 냄비에 넣으신 후 고기와 양파, 대파를 넣고 푹 끓이신다. 어릴 적 김치찌개에는 감자가 푸짐하게 들어갔던 것 같다. 엄마표 깔끔하면서도 신맛이 일품인 묵은지와 담백한 고기 맛이 어우러진 찌개가 밥상에 올라오면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곤 했다.


엄마는 계절마다 특별한 국을 끓어주셨는데 가을이 무르익는 요즘 같은 계절엔 호박 갈치 국을 끓어주셨다. 동네 어귀에 자란 늙은 호박을 따다가 네모나게 썰어서 싱싱한 은빛 갈치 토막과 함께 팔팔 끓여내 마지막엔 청양 고추를 넣고 굵은소금으로 간을 해서 마무리 하신다. 이번 추석에 레시피를 여쭤보니 매우 간단한데도 국물은 감칠맛이 난다.


엄마표 국물 리스트를 떠올리니 끝이 없다. 제삿날이면 엄마는 옥돔 미역국을 끓이셨다. 가족과 친척들을 위해 시장에서 고르고 고른 옥돔을 손질해서 제주바다에서 난 미역과 함께 푹 끓이신다. 국물이 뽀얗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어릴 적엔 비릿한 맛이 느껴져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귀한 음식이라 눈을 밝히고 먹는다.


엄마표 국을 한술 뜨면 눈이 번쩍 뜨여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거 뭘로 간을 한 거야?"


엄마는 늘 대답하신다.

"소금 쪼금, 간장 쪼금....."


맨날 그 대답이라고 엄마에게 타박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는 대강 짐작으로만 간을 하셔도 그 맛이 난다는걸... 엄마는 스물세 살에 시집와서 평생 국을 끓이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사셨고 집안 대소사를 치를 때도 나에겐 상상도 못한 대인원을 위해 곰솥 냄비에 국을 끓여 내셨다. 눈 대강 만으로도 손짐작 만으로도 맛이 날 수밖에.


엄마는 국에 들어가는 식재료가 삶이신 분이다. 처녀 시절엔 가난한 집을 일으키기 위해 제주 바다를 누비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로 살아오셨고 농촌으로 시집와서는 시집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농작물을 키워오셨다. 바다에서 나는 재료와 밭에서 나는 재료가 엄마의 삶인 것이다. 그러니 국물 맛이 안 날수가 있겠는가...!


엄마를 닮은 나는 살갑지 않는 편이라 엄마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살아오진 못했다. 우리는 말보다는 음식을 먹으며 속정을 나눈 것 같다. 엄마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밥 먹어라!" "집에 먹을 건 있냐?" "김치 가져가라!" 늘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게 엄마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엄마의 국물 한 스푼으로 나는 자랐고 지금도 엄마표 국물 한 스푼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엄마 품에서 자라고 있다. 고향에 엄마가 계시다는 게, 마음만 먹으면 내달려서 국물 맛 어떻게 내느냐고 비법 좀 내놓으라고 국타령하는 딸이 될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처럼 국물이 당기는 날엔 엄마를 그리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정아빠의 새로운 취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