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이야기를 마치며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렇게 많은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피렌체에서는 그렇게 적었다. 거대한 애정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가보지도 않았던 하나의 도시를 그리워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고작 3학점짜리 수업 하나였던 것처럼. 영화 한 편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가진 매력에 더 깊게 빠져들었고, 그 영화 이야기를 하던 가을밤이 없었더라면 그 감동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안다. 기껏해야 두 시간 정도였던 이동 시간에 우연히 기차에서 만난 이스라엘 아저씨와 대화를 하며 바라본 인터라켄의 풍경이, 그때 건너편에서 친구가 남겨준 사진 몇 장과 그 사진들을 보면서 알게 된 아저씨의 다정한 눈빛이 스위스 여행을 소중하게 기억할 이유가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알고 있어 반가웠던 장소와 몰랐던 곳에서 느꼈던 경이로움, 그리고 우연히 만나 기억에 새겨진 사람들이 그 여행을 가득 채워주었다.
돌아온 지 반년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달라진 것들도 있고, 달라지지 않은 것들도 존재한다. 달라진 것이라면 언어를 무작정 표출하는 대신 이전보다 더 담고, 끌어안고, 마침내 빚어내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것. 생각이 많고 그 많은 생각들을 굴리며 하루하루를 쌓아 올려가는 나, 그런 나의 성향을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 타인이 소중했던 만큼이나 나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기억하면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
여전히 여름이 좋다. 그 더위가 지긋지긋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워하고 있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밥도 천천히 먹고, 메뉴 하나 고르는 일도 매번 어렵다.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다. 아직 문학이 좋고, 사람이 좋고,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 즐겁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도, 비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도.
2025.07.13.
린덴호프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상점가가 위치한 골목들을 지나왔다. 우연히 들어가 본 갤러리를 지키고 있던 아저씨는 아무래도 이탈리아 사람인지, 들어갈 때는 “부온 조르노!” 나올 때는 “그라치에!”하고 인사를 했다. 스위스에서 만난 이탈리아 아저씨라니! 어떤 사연으로 스위스에 있는 것일지 상상해 보다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쓰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더랬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면서—그러니까 볕뉘를 이불 삼아 벤치에 누워 있는 여자가 있다. 단체로 온 것인지 소년 무리가 어느덧 뒤에 모여 기합 소리를 맞추고 있다. 파란 머리를 한 어떤 여자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자리에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여행하듯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순간도 특별하게 느껴지지만, 평범해 보이는 순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 지난 여름의 여행이었으니까.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몰랐던 세계를 맛볼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늘 문학을 사랑할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고는 했는데, 여행의 맛은 조금 달랐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은 같지만, 정말 몸으로 느끼게 되니까. 아직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많다. 여행도, 혼자 보내는 시간도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 여행 이야기는 아주 오래도록 우려먹게 될 것이다. 잊을 만하면 사진을 들여다 보고 영상을 찾아보고 녹음해 둔 음성 녹음을 틀어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릴 테니까. 한편으로는 다음 행선지를 그려보면서. 사람이 정말 기억을 먹고사는 존재라면, 스스로의 보호자로 다녀온 첫 여행은 가지고 있는 기억 중에서도 가장 다채로운 빛을 띠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2025.07.23.
인천행 비행기 안에서
과분했던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이 내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만 했지 이루어지리라 믿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
그러니까, 내 안에 여전히 동력이 남아 있었다. 나아갈 힘이. 그럴 의지가. 그걸 믿고 싶어 하는 소망이.
내 사랑은 무사하다. 부디 너의 사랑도 그러하기를.*
(*언젠가 SNS에서 보았던 문장들을 생각하며 썼다.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에 나오는 대사라고 들었다. 읽지 않았으나 언젠가 꼭 읽어볼 예정이다.)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두 계절을 보내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되뇌면서도 사랑을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여름에 파리 어느 공원에 혼자 앉아 적어두었던 것처럼, 사랑은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 하나만 가지고서는 살아낼 수 없는 것이 삶이었다. 사랑 없이는 그 삶이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
반드시 사랑을 논하는 글을 쓸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지켜내야 하는 가능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나가고 싶다. 아마 앞으로의 방향도 그럴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넉넉하게 가져야만 한다. 때로는 회의감이 찾아올 것이고, 어떤 순간에는 무너질지도 모르고,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시행착오는 겪을 것이다. 그래도 비슷한 모양의 산을 지나온 경험이 있으니 그 경험들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세기의 사랑도, 영화 같은 사랑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닮은 사랑을 담을 것이다. 받은 사랑의 모양을 닮은 마음들에 대해. 마음의 힘을 믿을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다정을 지지하는 내일이기를. 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의 행동으로 출발할 수 있기를.
아직 미완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꿈을 심어준 지난 여름을 보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