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6.
경기도 양평
기어코 삶이란 마음의 무게를 두는 쪽으로 수렴하는 것인지. 곱씹어 생각하고 상상하고 꿈꾸다 보면 현실에 가닿게 되는 소망도 있는 것인지. 소망을 끌어안고 사는 삶이 거룩에 가까울 수 있는 삶이라면 나도 그 길로 잘 나아가고 있는 것이기를. (…) 내가 믿는 것들로 구성되는 것이 결국 삶이라면 부디 내 믿음이 도달하는 것들은 철옹성처럼 높은 벽이 아니라 드넓은 초원의 나무 한 그루 같은 것이기를 기도해야겠다. 견고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세상을 넓게 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가능하다면 그 깊이까지도 가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무언가를 너무 깊이 생각하려는 시도가 나를 지나치게 무겁고 어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가장 신뢰했던 관계 속에서도 내가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바뀌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압박이 되기도 했었다. 머리로는 그게 정답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마음은 좀처럼 받쳐주지 않았다. 그 고민 가운데 있던 시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내게 가장 필요했던 이야기를 해준 사람들을 만났다.
파리에서 마지막에 묵었던 숙소는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마음 한구석이 괜찮아진다 싶으면 다른 쪽에 상처가 나기를 반복했던 그즈음의 나는 외향성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말수가 줄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고, 한인민박에 혼자 묵는 것은 처음이었던 데다 5인실이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좋은 추억만 가득 남았다. 짧게 머무는 동안 만난 낯선 사람들과 따뜻한 추억을 만들었던 2박 3일이었다. 마지막 날 밤에 공용 공간에 앉아서 간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또 듣던 시간은 내게 있어서 이 여행에 가장 어울리는 마침표였다. 각자의 이야기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어학연수 시작 전에 여행을 온 언니들, 영국에서 약학 공부를 마치고 약사가 될 거라고 말했던 언니, 한국에서 거리 예술을 하는 (정말 멋있었던) 언니와 패션디자인 전공에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더 급격히 가까워졌던 언니까지. 한동안 영문학 안에만 머물러 있었던 내게, 세상에는 이렇게나 다양한 모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전율을 느끼게 했던 만남들이었다. 아마 오래도록 못 잊을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편 시간이 비슷했던 언니가 있어 공항으로 가는 날에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낯도 가리고, 두 계절을 거쳐오면서 성격이 바뀐 탓에 말수도 줄어들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던 나에게 언니와의 시간은 예상 밖의 선물이 되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낯선 타인이었던 나에게 좋은 말들을 한아름 해주고 갔다.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며 말의 무게와 생각의 무게를 덜고 쾌활한 텐션을 억지로라도 끌어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나에게, 결국 내 속에 내가 파묻히던 시간을 버텨오고 있었던 나에게, 내가 나여서 너무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 몇 마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연한 만남들이 나를 수렁에서 건져 올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마음을 깨끗하게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때 그 만남들이 아니었다면 도약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더 헤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정말 고마웠다고, 긴 유럽 여행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무래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며칠이 그때의 나를 구했던 것 같다고. 나는 나를 구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테지만, 우연한 만남들이 빚어낸 값진 기억들이 괴로움에 빠질 때마다 다시 나를 살릴 거라고.
I can't undo all I have done to myself,
what I have let an appetite for love do to me.
I have wanted all the world, its beauties
and its injuries; some days,
I think that is punishment enough.
Often, I received more than I'd asked,
which is how this works—you fish in open water
ready to be wounded on what you reel in.
Throwing it back was a nightmare.
Throwing it back and seeing my own face
as it disappeared into the dark water.
Catching my tongue suddenly on metal,
spitting the hook into my open palm.
Dear life: I feel that hook today most keenly.
Would you loosen the line—you'll listen
if I ask you,
if you are the sort of life I think you are.
—Maya C. Popa, 「Dear Life」
2025.07.22.
파리
사랑하기를 선택했던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것.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이끌어낸 자신의 행동들을 번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화자의 목소리에 마음이 동했다.
무엇이 되었건, 무엇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 그 힘을 잃어가는 것도, 결국은 나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가 너무 강력해져서 타인과 사회와 공동체의 존재가 힘을 잃는다.
결국 내가 사랑에 대한, 공동체와 상호 신뢰 등의 가치들에 대한 믿음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래했다는 것은, 이제 스스로에게서부터 눈을 들어 시선을 옮겨볼 필요가 생겼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를 사랑하면서도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것인가.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면서도 어떻게 타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고등학생 때부터 쓰던 블로그 이름은 “마음을 들이다”. 여기서 “들이다”는 “밖에서 속이나 안으로 향해 가게 하거나 오게 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쓰거나 바치다“의 타동사로 이해될 수도 있다. 어릴 때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기는 해도 이제 생각해 보니 제법 잘 지은 것 같다. 글을 쓰고 그 글을 읽어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만큼은 마음을 다 담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받는 일도, 내 마음을 온전히 쓰는 일도 여전히 어렵지만. 자랄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여름 이전의 나는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름 이후의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되겠다던 마음을 회복해갈 수 있었다. 겨울에 접어든 지금, 그리고 해가 바뀐 지금의 나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영미문학을 읽는 방법론을 제시해 주는 수업이 불과 며칠 전에 끝났다. Y교수님은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일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셨다. 문학은 정답을 알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고. 다만 우리가 현실을 살아갈 때 갈등을 견뎌낼 힘을 길러줄 수는 있다고. 그 말에 매료되어 수강 유지를 결심했고, 3주 동안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정신분석학에서 논하듯 현실에서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래서 긴장 상태가 “0”의 수치에 도달하는 죽음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숙명적으로 정해진 운명이 단지 긴장과 고통을 피하기 위한 종말이라면 삶을 살아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면서 결국 돈이 권력을 갖게 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모든 비판적 의견을 포섭해 몸집을 키워가기만 할 일이라면, 아무리 공부를 하고 아무리 현실에서 발견하게 되는 어떤 불합리함을 지적한다고 해도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문학이라는 것은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 은유, 상징, 반복 등 여러 형식을 통해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라고 해도—그 흔적을 찾아나가는 일이 흥미로운 일이라고 해도 결국 문학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정말 쓸모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진짜 달라지기는 할까. 그 고민을 제일 많이 했는데, 아직 내 마음은 반반인 것 같다.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늘 노력하는 사람은 소수일 텐데, 현실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문학을 이렇게 읽든 저렇게 읽든 무슨 의미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느껴야 한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원히 “나”라는 1인칭 시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가, 어쨌든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도모하며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 갈등을 완전히 봉합하는 일은 어려울지라도 봉합하려는 시도는 해봐야 하니까. 완벽히 타인인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다 보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 우연한 발견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 우리 모두에게 “나”라는 존재가 강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1인칭의 시점에서 할 수 있는 한 타인과 시선을 맞춰갈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문학을 읽을 이유는 아직 충분한 것 같다. 결국 모든 변화는 차근차근, 한 사람에게서부터 비롯될 일이라면.
그러니까 희망을 걸어봐야 한다. 세상이 미련하다고 말하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설령 틀렸다고 해도, 정말 삶을 살아내는 방식의 오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서사가 파괴되고 과정이 생략되는 효율과 결과중심주의의 법칙이 정답이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오답을 택할 수 있는 삶이기를 바란다. 감당할 수 없는 급류를 타기보다는 유유히 흘러가기를. 인내하면서 나를 빚어낼 수 있기를. 나를 빚어내는 일이 나에게서 멈추지 않기를. 그릇의 크기를 조금씩 키워가다 보면, 타인도 나도 모두 더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마음을 찾던 길목에서>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