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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나린 Jun 05. 2023

취재원과의 관계 맺기

"선배님, 저 이런 것도 참아야 하나요?"

취재원 : 기삿거리나 그 재료 따위를 제공 또는 확인해 주는 사람.


기자가 되면 취재원은 당연히, 또 자연스럽게 생기는 줄 알았다. 기자니까 다들 기사가 될 만한 내용을 알려줄 거라 여겼다. 다른 기자들보다 성실하게 눈이라도 한번 더 마주치고 인사라도 한번 더 하면, 기삿거리가 있을 때 떠올려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언제 줄지도 모를, 아니 줄지 말지도 모를 먹잇감을 기다리는 하이에나 같았다.


신문에는 크든 작든 선행을 한 사람을 매주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짧은 인터뷰 기사에서 제일 어려운 건 인터뷰 대상을 찾는 일이었다. 기자들이 돌아가며 맡는 코너인데도, 기자가 얼마 없으니 내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평소 인사만 주고받던 관공서 직원이 그날은 유난히도 살갑게 다가왔다. 옆 부서 팀장이 있는데, 사람이 참 좋다며. 얼마 전에 무슨 상을 받았단 이야기까지 곁들여 그 코너에 잘 어울리지 않겠느냐고 추천했다.

'아싸, 이번 내 차례는 이걸로 가뿐히 때우겠구나!'

별생각 없이 쓴 기사가 의도하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그래서 그 기사를 불편하게 바라본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인터뷰 대상자가 당시 감찰을 받고 있었다는 것, 기사 보도 이후 그가 도리어 승진을 했다는 것, 그를 내게 추천한 이의 의도가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

섣부른 그 기사 끄트머리의 내 이름 석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누군가의 음주운전 같은 기삿거리는 수시로 들려왔다. 익명으로 전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발신처는 늘 그들과의 경쟁관계였다. 어떤 날엔 그 짧은 메시지에 평소 눈엣가시 같던 이들의 추락을 기대하는 설렘마저 녹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역학 관계를 안다고 해서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먹잇감이 썩은 고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최소한의 배경이 될 뿐.

오히려 그 관계를 잘 이용해야 기자로서 역량을 높이 평가받는 세계였다.





'취재원'이라는 존재를 고민해 본 것은 역설적이게도 기자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였다.

내게 '취재원'이라 부를 만한 이들이 손에 꼽을 만큼 생겼다 여겼을 때, 그제야 나는 '취재원'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닿았다.

"취재원은 말이다, 나한테 기삿거리를 주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궁금해하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술자리에서 한 선배기자가 말했다.

자타공인 고인물 꼰대의 라떼 같은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곱씹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취재원'의 기준이 됐다.


평소처럼 아침 일찍 경찰서에 도착한 날이었다. 경찰서 로비 앞에 세워진 45인승 전세버스가 영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버스 앞에 휴대전화를 들고 선 이들의 웅성거림마저도 낯선 것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날이었다.

한밤중에 형사들이 '빵게판'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도박장을 단속했다는 걸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십여명의 진술서를 받느라 형사과 사무실은 도떼기시장이었고,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말들은 금세 짜맞춰졌다.

배 과수원이었다는 하우스 위치를 알고 싶었다. 취재 자체를 거부하는 형사과장을 들쑤시는 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내게 주소지를 슬쩍 귀띔해 줬다. 내 기억 속의 첫 취재원이었다.

난장판이 된 과수원 저장창고를 다녀온 뒤 마감 직전 형사과장에게 취재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누구냐. 거긴 어떻게 알고 갔느냐. 과장이 꽤 위협적으로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 성질머리가 조금이라도 풀어질 때까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영원한 취재원은 없다.

상황이 바뀌고, 입장도 달라지고, 사람도 변한다. 그러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다.


맨 땅에 부딪혀서 찾아내고 관계를 키워가는 취재원도 있지만, 선배기자에게 소개받는 인적네트워크도 있다. 수준 높은 취재원이 한정적이고, 접근방법도 제한적인 영역일수록 후자의 비중이 높다.

나보다 앞서 이 바닥을 구른 선배기자가 오랫동안 다져놓은 취재원을 소개해준다는 것이 자신의 취재자산을 떼어주는 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만큼 후배기자를 인정하고 더 성장하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후배기자 입장에서 취재원을 소개받는 건, 좀 과하게 말하자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노동 분야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선배기자가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며 저녁자리로 불러냈다. 대기업 노조의 현장활동가인 덩치 큰 중년의 아저씨는 만나자마자 냅다 맥주잔에 소주를 들이부어 내게 권했다.

기자라는 직업에 한번도 발을 담가본 적도 없으면서, 모름지기 기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며 연신 따르는 술이 불쾌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선 넘는 말, 잔을 넘는 술, 그 어느 하나도 한번을 막아주지 않는 선배기자 앞에서 그것들을 고스란히 삼켜야만 했다. 내 성질대로 내지를 수는 없었다. 선배기자의 인적 자산을 넘겨받는 귀중한 자리라고, 그러니 참고 버텨야 한다고,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구역질과 함께 삼켰다.

그날 저녁 한없이 무례했던 그는 끝내 내 취재원이 되지 못했다. 그는 사사건건 선배기자를 들먹이며 나를 압박했고, 자신이 몸담고 있던 현장조직에 불리한 기사 한줄에 칼같이 나를 잘라냈다.

시간이 흘러 그 선배기자가 내게 물었다. 그 활동가와는 연락하지 않느냐고.





마감을 맞춰놓고 한숨 돌리는 초저녁. 수습기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앳된 여기자가 슬쩍 웃어보이는 입꼬리 끝에서 그늘이 졌다 사라졌다.

꺼내기가 적잖이 어려운, 할 말이 있구나.


한참을 뜸 들이다 하는 말이, 고민이 있단다.

며칠 전에 친구들과 만나 신나게 놀고 있는데, 우연히 출입처 직원과 만났단다. 반가운 인사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직원의 합석 요구를 웃으며 거절하느라 애를 좀 먹은 모양이다. 그날 이후로 그 직원이 제안하는 몇번의 저녁식사와 술자리를 번번이 거절하고 있는 중이었다.

후배기자는 그 직원의 친절한 태도마저 부담스럽다고 했다. 불편한 마음을 넘어 불쾌의 언저리까지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선배님, 취재원을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저, 이런 것도 계속 참아야 하나요?"


원론적인 조언이었다. 그 불쾌한 상황마저도 참고 견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 조언이 어린 기자에게 또다른 폭력이 되어버린 것인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떤 한 단어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어린 기자도 며칠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을 일이었다. 매일 출입처에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 어린 수습기자에게 건넨 말이 고작 "잘 고민해 봐라"였다. "그렇게까지 네가 참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 뒤따라 붙었지만, 어디까지나 네 판단과 네 선택이라고 선을 그은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몇몇 여기자가 모인 저녁자리에서 얼마 전 복직한 여기자가 운을 뗐다.

"다들 수습 때 경찰서 돌던 거 기억하세요?"

은어로 사스마와리. 아는 사람 한명 없는 경찰서에 가서 웃으며 말을 붙이고, 차를 마시는 시간 중에 유쾌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여기에다 수습기자가 여기자면 어김없이 외모에 대한 평론과 남자친구 유무 같은 것들이 뒤섞인 성희롱이 시시콜콜한 농담처럼 튀어나왔다. 중년 남성들의 키득거림을 웃는 낯으로 버티면서 속으로 몇번을 울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 기억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땐 그랬지' 같은 낭만 따위로 포장됐다. 견디지 못하는 이가 나약하단 핀잔을 받았다.

그날도 그랬다. 수습 시절이 까마득한 기자들이 허황된 낭만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일 참이었다.

이 주제를 던졌던 여기자가 말했다.

"저는요, 이제 더이상 수습기자들한테 사스마와리 못 시키겠어요. 그게, 경찰서에서 웃음 팔라는 거랑 뭐가 달라요?"


선배기자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다시 후배기자에게 그렇게 되물림해오던 것들이다.

그것의 폭력성을 알면서도, 나 스스로를, 그리고 후배기자를 궁지로 내몰아왔다.

기자가 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취재원일지 모를, 혹은 미래에 취재원이 될지도 모를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잘 유지해야 한다고.

때론 은근했고, 때로는 노골적이었다. 분위기가 그랬고, 관계가 그랬고, 일이 그러했다.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둔 지금도, 나는 그 과정이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내게 끙끙 앓던 고민을 털어놓은 어린 수습기자에게 좀 더 단호하게 말해줄 걸 그랬다 싶다.


'참지 마라. 네 기자생활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취재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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