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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나린 Jul 06. 2023

드라마 속 기자는 없다

판타지와 현실의 괴리

신문사에는 해마다 수습기자가 들어왔다. 적자 운영이라고 울고 앓는 소리가 나와도 채용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렇다고 편집국에 기자가 넘쳐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워낙 최소한의 인력으로 돌아갔고, 매년 누군가가 나가고 채워지길 반복할 뿐이었다. 딱히 채용시즌이라는 게 없으니, 기수 따위는 지역일간지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습 딱지를 떼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첫 후배기자가 들어왔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기자였다. 분명 서로 존댓말을 주고받았지만, 그 대화의 70% 이상이 교육이란 형태의 업무지시와 보고인 이상 마냥 수평적인 관계일 순 없었다. 나이 어린애가 1년 먼저 들어와서 선배랍시고 원고에 빨간펜으로 줄 그어가며 지적하는 모습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꼴사납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로망이 대단했다. 아버지가 일하던 신문 보급소에서 시사 월간지를 즐겨봤다고 했다. 그는 역사 속의 굵직한 사건이나 정치인의 히스토리를 줄줄 읊었다. 얕고 잡다한 그의 지식들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역일간지에서는 그보다 경찰서 형사들에게서 한두마디 더 얻어듣는 능력이 더 반짝였다. 그의 얕고 잡다한 지식은 술자리 안주에 그쳤다.





어느 순간부터 수습기자들과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갑자기 드라마가 툭하고 튀어나왔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였다. 수습기자들은 드라마를 보며 좋게 말하면 로망, 현실적으로 말하면 환상을 키웠다고 했다. 한동안 지겹도록 언급된 단골 드라마가 '피노키오'였다. 두 주인공이 방송기자로 나오는 드라마를 지역일간지 신문쟁이로 온 수습기자들은 몇년이나 우려먹었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놀랍지도 않다. 현실 속 기자는 드라마 속 기자보다 몇배는 더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하루들을 보낸다.

드라마 속 기자들은 경찰서 숙직실에서 쪽잠을 자고 지박령처럼 배회하며 경찰청 담당 선배기자인 캡에게 보고할 거리를 찾는다.

현실의 경찰서에 기자들을 위한 숙직실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엘리베이터 옆에 복도에 겨우 책상 2~3개 놓고 유리문을 달아 만든 기자실마저도 몇년 뒤엔 사라졌다.

서울 중앙지 기자들은 다른 세상에서 사나 보다 했던 적도 있다. 서울에서 수습교육을 한달 정도 받고 지방도시로 온 방송기자가 새벽 5시에 경찰서 로비 벨을 눌렀다는 이야기에 위압감을 느끼기도 했다. 서울과 지방도시의 격차인가 싶은 생각이었다.

얼마 후 서울에서 경쟁관계의 중앙매체 수습기자들이 서로 손잡고 구역을 나눠 얻은 정보를 공유하는 생존형 공생관계를 구축했다가 업계가 발칵 뒤집혔단 소식을 들었을 땐 그저 웃음이 났다.





가끔, 아주 가끔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일 때도 있었다. 기자 일이라는 게 중간은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쓰일 것 같은 일들이,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질 일들이 작은 지방도시에도 이따금씩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짧게는 하루, 길면 한달가량 긴장해야 했다.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진척되는 상황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탓에 신경은 늘 곤두서 있었다. 온몸의 에너지를 쥐어짜내 취재와 기사 작성을 반복해도 일이 끝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가 몸 담았던 매체는 일간지였다. 매일 아침 조간신문을 찍어내는 일간지라 매일 늦은 오후가 기사 마감 시간이었다. 이벤트가 있든 없든 마감은 전쟁이었다. 오늘의 마감을 지키지 못하면 내일 아침 신문은 없는 거였다. 어떤 상황이든 마감 1~2시간 전에만 정리되면 그만큼 반가운 것도 없었다. 분 단위로 달라지면서 계속 이어지는 상황은 어느 시점에 끊어 기사를 마감할 것이냐는 고민만 키울 뿐이었다.


특히 대기업 노사의 임금협상 땐 취재기자의 야근은 확정이었다. 임금협상은 늘 '줄다리기', '릴레이' 이런 말들로 표현되는 과정을 거쳐 늦은 저녁에서야 마무리됐다. '극적 합의'라는 그림으로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전략이었을 거다. 협상이 늦어지면 피가 마르는 건 조합원이 아니라 기자였다. 협상 중, 잠정합의, 협상 결렬. 매번 3가지 시나리오에 맞춰 비슷한 분량의 기사 초고를 작성한 뒤 무한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마감 10분 전 잠정합의 결과를 듣고 아슬아슬하게 원고를 밀어 넣던 날, 편집국에 남아있던 기자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가 이내 씁쓸함을 삼켜야 했다. 내 임금이 오르는 협상도 아닌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현타'가 밀려들었다.


마감 원고를 넘겨도 일이 끝나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퇴근 없이 현장을 지켜야 했고, 몸은 분명 퇴근해서 집에 있는데도 머리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기술 발전이 기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했다. 노트북을 켜지 않아도 휴대전화로 정보보고는 물론 기사를 쓸 수 있는 시대였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사를 써서 넘기라는 업무지시가 내려왔다. 그렇게 작성된 기사는 홈페이지와 SNS에서 빠르게 소비됐다. 종이신문보다 인터넷에서의 기사 한줄이 더 큰 관심을 받는 시대였다.

점점 더 마감시간은 무의미해졌다. 빠른 기사를 원했고, 출근 전이든 퇴근 후든, 주말이든 기사 작성 지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어졌다. 통신사보다 빠르게 속보 처리를 해야 할 땐 정체성이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발성 속보만 쓰면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속보 처리를 한 뒤에는 뼈대에 살을 붙인 해설기사, 그러니까 깊이감이 있는 기사를 신문지면용으로 다시 마감해야 했다.


유튜브 같은 동영상 콘텐츠가 유행하자 신문사에 'TV'라는 타이틀을 달고 뉴미디어 부서가 생겼다. 신문기자에게 방송 마이크를 주고 카메라 앞에서 원고를 읽는 이른바 '스탠딩'을 하라는 고리타분한 업무지시는 금방 사라졌지만, 영상 촬영은 부가적인 일로 더해졌다.

지역일간지에 사진기자는 고작 한두명이라 웬만한 현장 사진은 취재기자가 찍을 수밖에 없었고,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회사는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줄 아는 '멀티플레이어' 기자를 요구했다. 환경의 변화에 살아남으려면 달라져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다. 그러니 내키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돈이었다. 일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는데, 돈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수습기자들의 월급은 겨우 최저임금을 웃돌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더 낫겠다는 말을 쉽사리 흘려보내기 힘들 지경이었다. 몸도 머리도 힘들고, 퇴근도 주말도 보장되지 않는데, 월급은 최저 수준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수습기자들이 참고 버텨내기 힘든 환경이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맞이할 미래가 눈앞의 선배기자와 데스크란 사실이 그다지 희망적이지도 않았을 거다.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나 역시 좋은 선배기자가 아니었다.

일이 힘들어서, 마음이 지쳐서, 많은 이들이 떠났다. 3개월의 수습기간 동안 절반 이상이 떠났고, 나머지도 최소 경력 2년을 겨우 채우고 등을 돌렸다. 갈 곳 없이 남은 이들만 매 순간 스스로의 한계치를 시험하며 자리를 채웠다.


떠나는 이를 잡아본 적 없다. 스스로 동력을 잃으면 버티기 힘든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이 일이 재밌다고 여겼던 나조차도 지쳐 방황하고 있었다. 업계에 고인 물들이 모여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다'는 꼰대스러운 말을 내뱉어봤자 그들만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수습기자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나도 덩달아 같은 교육을 해마다, 어떤 때는 1년에도 몇번씩 되풀이해야 했다. 지긋지긋하고 귀찮은 수습교육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경력이 쌓여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 상태에 진절머리가 났다. 후배기자가 성장하지 않으면 나는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퇴근도 주말도 없는, 만년 사건사고기자, 경찰기자이고 싶지 않았다.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왜 나만 힘든 일을 해야 하냐는 불만이 쌓여갔다.

모두가 그러하듯 먹고살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낭만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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