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기념관
제가 정화를 처음 만난 곳은 중국이 아니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수도 두바이였어요. 2010년, 두바이와 아부다비를 여행했을 때였죠. 두바이는 서로 다른 콘셉트를 가진 테마 쇼핑몰이 많아서 쇼핑몰만 돌아다녀도 재미가 있는데, 이븐 바투타 몰(Ibn Battuta Mall)에서 정화 원정대의 항로와 당시 모형 배가 전시되어 있는 걸 봤어요. 정화가 두바이까지 왔었다는 놀라움이 들었고, 그떄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어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도 많았는데, 정말 다양한 피부색과 국적의 아이들이 모여 있던 것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난징에는 ‘정화 기념관’이 있어요. 정화는 1371년 태어나 1433년에 사망했으며, 묘는 난징 우수산에 있어요.
정화가 아프리카에서 기린을 중국으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죠. 당시 조공도를 보면 여러 나라 사신들이 황제 옆에 서서 조공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당시 국제관계가 어떤 분위기였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는 조카를 몰아내고 3대 황제가 되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스스로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고 싶었던 영락제는 무슬림이었던 환관 정화(키가 2m가 넘었다는 말도 있어요)를 원정대 총지휘관으로 삼아 대규모 함대를 꾸려요.
바로 그 유명한 ‘정화의 대항해’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3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이 원정은 총 7차례나 이어졌고, 항해 범위는 중동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총 항해 거리는 지구 네 바퀴에 달한다고 하네요.
겉으로는 ‘조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매우 후한 거래가 중심이 된 이 교류는 주변국에도 실익이 컸고, 자연스럽게 활발한 무역과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의 문물이 항로를 따라 퍼져나갔고, 중국 또한 각국의 낯설고 신기한 물건—동물과 식물을 포함한—을 들여오며 서로가 서로에게 실익을 가져다주는 평화로운 국제 관계가 이뤄집니다.
경향 대운하(베이징~항저우 운하)를 완공한 영락제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뒤, 북쪽에서 오이라트족의 위협이 커지자 북쪽에 집중해야 했어요. 굳이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운하를 통해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원정을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고, 정화의 사망과 함께 중국의 대항해 시대도 막을 내립니다.
바다를 포기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 후 500년 뒤, 바다를 통해 들어온 서구 열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중국은 세계 패권을 잃고 스스로 ‘굴욕의 100년’이라 부르는 처절한 시기를 겪게 되었죠.
지금 중국이 우주패권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과 자원을 쏟아붓는 이유도 과거의 쓰라린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일 것입니다.
우주패권을 먼저 잡겠다는 나라가 옆에서 열 올리고 있으니 우리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