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자와 돌을 던지는 자 :
죄의 무게와 대중의 알 권리에 대하여
연예인의 과거 폭력, 정치인의 소년원 이력, 유명인의 오래된 범죄 전력이 뒤늦게 알려질 때마다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얼마나 오래, 어디까지 과거를 공개해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정말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성경 속 예수의 이 말은 관용과 용서의 상징처럼 인용되곤 한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며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법정 앞에서 이 구절은 묘한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부모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사는 피해자는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는가?
최근 배우 조진웅의 과거 소년 범죄 의혹과 정우성의 혼외자 논란 등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공인들의 도덕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단순히 그들의 사생활을 엿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다. 이것은 '공정한 심판'과 '피해자의 눈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질문이다.
가해자만 볼 수 있는 기록,
피해자는 모르는 진실
한국에서는 소년사건 기록은 엄격히 비공개다. 가해자 본인만 열람할 수 있고, 심지어 피해자도 볼 수 없다. 동시에 학교폭력은 생기부에 기록되어 대학 입시에서 불이익을 주고, 심한 경우 합격이 취소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사람을 크게 다쳐 병원에 실려 가게 만들었거나, 소년원에 갈 만큼의 범죄는 비공개인데, 그보다 상대적으로 경미할 수도 있는 학폭 기록은 입시와 진로를 좌우한다.
한편으로 한국 사회는 “가해자 인권”에는 민감하면서도, 피해자의 감정과 인권에는 상대적으로 무감각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외국에서는 강력범죄자의 얼굴과 이름을 그대로 보도하는 나라들도 있지만, 한국은 끝까지 모자이크를 씌운다. 형벌 수준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정작 피해자는 “나만 영원히 갇혀 사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돌을 던질 자’와 ‘주홍글씨’를
단 사람 사이
‘나라고 완전히 깨끗한가?’ ‘과거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소설 『주홍글씨』는 같은 질문을 정반대의 방향에서 조명한다. 목사는 유부녀와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갖게 하고, 그 대가를 여자가 혼자 치르게 한다. 여자는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평생의 낙인을 안고 살아간다. 반면, 목사는 겉으로는 경건한 목사로 살아가면서 속으로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결국 뒤늦게 고백하지만, 그 늦은 참회가 피해자의 생을 되돌려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 두 장면 사이를 오간다.
“누구나 죄인인데, 어디까지 돌을 던질 수 있나?” 그러면서도 “왜 어떤 사람의 죄는 낙인으로 남고, 어떤 사람의 죄는 교묘히 숨을 수 있나?” 하는 분노를 지운 채 넘기지 못한다.
용서를 말하기 전에, 피해자의 마음부터
영화 〈밀양〉에서 한 장면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자식을 잃은 엄마 앞에서, 가해자는 교도소에서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엄마가 말한다.
“내가 용서 안 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해요?”
용서는 종교적 언어로 너무 쉽게 소비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에게 용서란, 삶 전체를 다시 뒤흔드는 문제다.
–학교폭력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음주운전으로 가족을 잃었는데, 가해자가 진심으로 울었다고 해서 마음이 풀릴까?
–나를 지옥처럼 괴롭히던 사람이 방송에서, 국회에서, “정의·인권·약자 보호”를 이야기하며 영웅처럼 사랑받을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일본 소설 『빙점』에서 목사는 살인자의 아이를, 살해당한 아이의 부모 집에 입양시키는 실험을 한다.
“인간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현실에 가져오면, 그것은 더 이상 문학적 실험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다시 칼을 들이대는 잔인한 실험일 수도 있다.
뉴스에서 가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재판정에서 가해자에게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말을 듣고 가해자가 오열하는 장면이 보도된다. 하지만 그 장면이 가능해지기까지, 그 부모가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지는 뉴스에 실리지 않는다. 용서는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더구나 가해자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과시할 권리도 없다.
더 글로리, 그리고 공개되지 않는 죄
드라마 〈더 글로리〉는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피해자가 복수라는 방법으로 ‘정의’를 탈환하려는 이야기다. 이는 전 세계 시청자에게 한국의 학폭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동시에 우리에게 묻는다.
“제도가 가해자를 보호하고, 기록을 숨기고,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때, 피해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학폭은 생기부에 기록되고, 입시에서 불이익을 줄 수 있다. 반면, 그보다 훨씬 중한 소년범죄 이력은 성인이 된 뒤 비공개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사회는 그를 “깨끗한 백지”로 대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왜 어떤 죄는 평생 따라붙는 낙인이 되고, 어떤 죄는 성인이 되는 순간 마술처럼 사라지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연예인과 공직자,
우리는 어디까지 알고 싶어 하는가?
일반 시민의 과거 비행까지 영원히 끌어내려 공개하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인간은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10대의 잘못을 영구적인 족쇄로 삼는 사회는 결국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먹고사는 직업,
특히 정책과 예산,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는 선출직 공무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예인은 작품 속에서 정의로운 역할을 맡고, 방송에서는 도덕과 선을 이야기하며 광고를 찍는다. 정치인은 “공정·정의·인권·약자 보호”를 외치며 표를 구한다. 그런데 그들의 과거에 심각한 폭력, 중대한 범죄, 반복적인 가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다면, 대중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때 문제의 핵심은 과거의 죄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숨긴 채 도덕적 권위를 소비해 왔다는 점,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한 이중잣대를 보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말한다.
“적어도 공직자라면, 청소년 시절을 포함해 중대한 범죄 이력은 공개돼야 하는 것 아닌가?”
“대중의 사랑으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과거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과 사과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죄를 숨기면,
죄를 지어도 된다는 신호가 될까?
“어차피 공개 안 되니까,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런 생각이 퍼지면, 비밀스러운 범죄는 줄지 않는다. 공개와 형벌의 엄격함은 분명 범죄 예방에 일정 부분 기여한다. ‘걸리면 인생 끝난다’는 사회적 인식은 최소한의 브레이크가 된다. 동시에, 지나치게 가혹한 낙인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 가해자가 아무리 반성하고 살아도, 사회가 그를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또 다른 범죄의 길로 내몰릴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무조건 숨기기 vs 평생 낙인찍기”의 선택지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범죄의 정도와 종류
– 단순 비행과 중대한 폭력을 구분해야 한다.
– 치명적인 피해를 남긴 범죄라면, 공직·공인에게는 보다 강한 공개 기준이 필요하다.
시간과 변화의 증거
– 시간이 얼마나 지났고, 그 사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살펴야 한다.
–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 회복 노력, 자기반성의 궤적이 있는가?
역할의 성격
– 법과 제도, 약자의 이익을 다루는 사람일수록 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 대중의 도덕적 롤모델을 자처할수록 과거에 대한 책임도 무거워진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목소리
– 용서는 사회가 대신 선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제 그만 잊고 살아라”는 말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또 한 번 폭력일 수 있다.
죄와 용서 사이, 우리가 설 자리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를 믿고 싶다.
하나는, 인간은 변할 수 있고, 과거의 죄가 평생을 결정짓지는 않아야 한다는 믿음.
다른 하나는, 피해자의 고통이 가해자의 성장 서사의 장식품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연예인의 과거 폭력, 정치인의 소년원 이력 공개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이 두 믿음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정답은 단순한 “공개해야 한다 / 말아야 한다”가 아닐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 피해자를 제쳐둔 채, 가해자의 눈물만을 감동적인 스토리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
– 자신의 과거에는 관대하면서 타인의 죄에만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우리는 더 엄격해야 한다는 것.
– 공직자와 공인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태도로 평가받아야 하지만, 그 현재의 태도 속에는 과거를 대하는 정직함과 책임성도 포함된다는 것.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과 진실한 책임, 피해자의 선택이 더해질 때, 그 죄는 다른 형태의 기억으로 변할 수 있다. 죄를 잊어도 되는 순간은, 가해자의 시간이 아니라 피해자의 시간이 허락할 때뿐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사회가 어떤 태도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죄와 용서의 문제를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공인의 과거, 알 권리와 심판의 필요성
혹자는 "어릴 때의 실수 아니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고 말하며 관용을 베풀자고 한다. 하지만 일반인이 아닌, 대중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인(연예인, 선출직 공무원)이라면 잣대는 달라져야 한다. 죄를 짓고도 숨긴 채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만연해지면, 사회의 도덕적 제방은 무너진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범죄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공직에 나가거나 대중의 사랑을 기반으로 돈을 버는 이들의 중대 범죄 이력(소년 시절 포함)은 공개되어야 한다.
가해자가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고, 피해자가 숨어 지내야 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외국처럼 머그샷을 공개하고 범죄 이력을 투명하게 다루는 것이 '가혹함'이 아니라 '정의'일 수 있다.
우리는 돌을 던지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지만, 명백한 악(惡) 앞에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 죄지은 자가 부끄러움을 알고, 피해자가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유명인의 과거를 엄격하게 검증해야 하는 이유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자신의 가족을 해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으신가요?
그리고 과거를 숨긴 채 정의로운 척 살아가는 유명인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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