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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Dec 13. 2024

바가지가 품은 생명



 올해는 박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 복숭아나무 밑에서 싹을 틔웠다.
아마도 지난해 속을 파서 거름 되라고 버린 것이 발아가 되었으리라.
난 어린 박모종을 옮겨 심고 거름을 듬뿍 주고 줄기가 타고 올라갈 수 있게 기둥을 세워 주었다
박 줄기는 잘 자라서 여러 개의 박이 달렸다.
풋박은 따서 국도 끓여 먹고 나박나박 썰어 볶아 먹기도 했다.
약을 치지 않으니 벌레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든 박도 여러 개였다.

 



끝까지 버텨낸  3개 중 멀쩡한 박은 1개뿐이었다. 벌레 먹은 도 버리기 아까워 반을 가르니 속에는 여전히 벌레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벌레에게 피와 살을 뜯긴 박은 여기저기 검버섯처럼 검은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해마다 소금물에 박을 삶아 바가지를 만든다.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 바가지 만드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래도 해마다 그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가지에 내 고향이 내 유년시절이 내 부모와 할머니의 추억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바가지를 만들어 내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쌀도 씻고 나물도 무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검버섯이 덕지덕지 붙은 박도 버리기 아까워 만들긴 만들었는데 어느 용도로 써야 하는지 생각이 떠 오르지 않았다.


나에게는 고택의 지붕에서 뜯어낸 기왓장이 여러 개 있다. 그중에 두 개의 기왓장에 소엽난이 자라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난은 풍성하게 번지고 있었다.

 밖에 나가 잔돌을 주어와 바가지를 비스듬하게 세우고 돌을 이용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기왓장에 있는 소엽난 중에 한 포기를 떼어 바가지 속으로 옮겼다. 검버섯을 닥지닥지 달고 죽어가던 바가지가 새 생명을 품었다.
박속에 들앉은 초록의 소엽란이 앙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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