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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치골에 산다
산골의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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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거인
Dec 12. 2024
김장 후유증으로 인해 피곤이 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길게 누웠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주방 쪽에 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가지를 만들려고 한쪽에 밀어둔 박이 발끝에 차였다. 그동안 눈에 밟혔지만 다른 일에 치여 외면당하고 있던 박이었다. 지난 추위에 얼었는지 표면에 검버섯처럼 얼룩이 생겼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박을 삶으려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길게 누운 해그림자가 사라지니 남편의 트럭이 후진으로 미끄러지듯 마당으로 들어왔다. 트럭에서 내리는 남편 손에 삼겹살이 들려 있다.
삼겹살을 구워야 하는데 해님이 사라진 산골에 추위가 찾아왔다.
우리는 박을 삶고 있는 아궁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궁이에 나무를 더 넣어 불길을 살렸다.
남편은 삼겹살을 굽고 바람은 고기 냄새를 숲에서 숲으로 끌고 다녔다.
삼겹살 굽는 냄새에 동쪽의 달님도
서쪽의 별님도 침을 흘리고 있다.
반찬이라야 생김을 굽고 김장김치에 삼겹살 그리고 시원한 맥주뿐이지만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의
먹어 본 적 없는
일급 요리보다 더 맛있다.
세상사에
속은
시끄럽고 밤바람이 달려와 살 속을 파고 드는 심술을 부려도 생김치 옷을 입은 삼겹살 한 쌈에 시원한 맥주,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아궁이의 불은 산골의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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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오르며 숲 길 걷기를 좋아하는 작은거인입니다. 사는 이야기를 일기처럼 기록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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