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다.
며칠째 이어지는 한파와 강풍에 산골의 바람은 눈보라를 휘날렸다.
지난 설 명절에 일주일간 제주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우리 부부가 집을 비우는 동안 지인에게 닭과 개의 먹이를 부탁했었다.
그녀가 제주의 여행이 궁금하다며 찾아왔다. 집 아래에 차를 두고 눈보라를 뚫고 걸어서 언덕을 올라왔다.
우리는 커피 한 잔 마시고 눈바람을 맞으며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백운계곡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백운계곡은 웅석봉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으로 지리산 둘레길인 8구간을 걸으면 볼 수 있다.
거대한 바위와 돌, 수정처럼 맑은 물이 어우러져 걷는 이들의 발을 쉬어가게 하는 숲이다.
백운계곡의 끝자락에 도착하니 지난해 봄에 걸을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노란색건물이 들어섰다. 색이 진한 노란색 건물은 휑휑한 겨울숲의 언덕에 서서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실내로 들어가 밖의 풍경이 훤히 보이는 통창 앞에 자리를 잡았다. 창너머로 소나무와 잎을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밤새 내린 눈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했다. 주인장이 주문한 음식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내어 준 차는 눈길을 뚫고 오느라 언 몸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메리골드와 중국의 무슨 차를 함께 우렸다고 했는데 이름을 까먹었다. 금방 들은 단어도 늘 익숙하게 사용하던 언어도 입속에서만 맴맴 거린다.
요즘 나의 뇌가 빠른 속도로 늙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다 치매가 찾아오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서울에서 살다 6년 전 귀촌했다는 주인장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취미로 종이꽃을 만든다고 했다.
창가 한쪽에 있는 화분은 생화와 종이꽃이 함께 어우러져 어느게 생화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가 아니고 '자세히 봐야 보인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실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기왓장에 그린 그림이 시선을 끌었다.
먼저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뒷 맛이 혀끝에 부드럽게 감긴다.
샐러드가 나오고 뒤이어 피자가 나왔다.
피자의 도우는 밀가루가 아니고 쌀가루로 만들었다고 했다.
도우는 얇고 바삭바삭 하고 피자는 느끼하지 않아 커피와 잘 어울렸다.
숲의 설경, 커피와 피자 그리고 좋은 사람과의 시간은 하루를 후딱 집어삼켰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리산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