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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이 품은

by 작은거인

재봉틀이 있는 내 작업실에는 25년을 같이 지낸 식탁이 있다. 식탁은 남편 손에 끌려 나와 마당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다.

한낮의 봄 햇살이 식탁 상판으로 내리 꽂히며 부서졌다. 물끄러미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우리 가족의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강한 기억 하나가 뻐근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결혼하고 10년 만에 집을 샀다. 그때만 해도 청약부금을 넣어 아파트 분양을 받는다는 건 하늘에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웠다.

다행히 우리는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그룹사에서 짓는 아파트를 조합원우선권으로 분양받을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집으로 가면 제일 먼저 뭐가 갖고 싶냐고 물었다. 첫 번째는 침대. 두 번째는 식탁, 세 번째는 책상, 아이들이 갖고 싶은 것들은 열 손가락을 다 접고도 모자랐다. 이사하고 우리 네 식구는 가구점에 가서 아이들이 맘에 들어하는 침대와 책상 그리고 식탁을 샀다.

그 식탁에서 아이들이 소풍 가는 날에는 김밥을 쌌다. 남편 월급날에는 네 식구 모여 앉아 통닭을 먹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었고 남편과 나의 눈물도 배어 있다.


남편은 6남매의 장남이었다. 시누이들은 나에게 맏며느리 노릇을 하지 않는다며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나의 존재감은 바닥에 떨어져 우울증까지 덮쳤다.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희생만 바라는 시누이들을 인정할 수 없던 나는 남편을 식탁으로 불렀다. 식탁에는 소주 한 병과 소주잔 두 개만 놓여 있었다. 숨도 쉬지 않고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고개를 숙이고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한마디를 식탁에 던졌다.

“이혼하자!”

고개를 들어 남편의 눈을 마주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아야 하냐! 당신네 식구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 내가 뭐라고 부모, 형제간의 천륜을 끊어 놓겠냐! 아이들도 당신 성을 가졌으니 남의 성인 나만 빠지면 된다!” 참고 참아 가슴에서 곪기 시작하는 말들을 숨도 쉬지 않고 토해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은 병에 절반쯤 남은 소주를 병째 거꾸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가 부모 형제와 인연 끊을게. 당신하고 아이들만 보고 살게. 내 인생이 여기에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내 인생을 살아 주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남편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의 사건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고비가 있을 때마다 버팀목이 되었다.


촌집을 구해 귀촌하면서 식탁도 함께 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친정엄마도 함께 왔다. 독한 약으로 인해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게 누룽지였다. 나는 식탁 뒤에 있는 가스레인지에서 매일 누룽지를 눌렸다. 엄마는 식탁에 앉아 누룽지를 오독오독 씹었다. 비록 두 달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엄마와 나의 이야기도 얹었다.




집을 짓고 식탁은 재봉틀이 있는 작업실에 자리 잡았다. 두꺼운 천을 뒤집어쓰고 재단판이 되고 다리미판이 되었다. 나는 식탁에서 남편과 내 옷을 만들었다. 10년 동안 작업실을 차지하고 있던 식탁은 큰아들이 이사하면서 두고 간 컴퓨터 책상에 밀려 마당으로 나왔다.

남편은 상판과 다리를 연결하는 나사를 하나하나 풀었다. 그때마다 다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다리는 아궁이 옆에 땔감용으로 던져졌다. 다리를 잃어 기댈 곳이 없어진 상판은 헛간 귀퉁이에 비스듬하게 서 있다.

성장한 아이들이 떠나고 남아있는 우리 부부를 보는 듯해서 한겨울 골바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남편은 가스통을 반으로 잘라 철근을 용접해서 4개의 다리를 붙여 고기 굽는 화로를 만들었다. 화로를 가운데 두고 나무판을 얹을 수 있는 지지대를 붙여서 비스듬하게 서 있던 상판을 잘라 그 위에 얹고 나사를 박아 고정시켰다.

우리 부부는 화로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맥주잔을 부딪히며 식탁이 품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냈다.

가족의 웃음과 눈물,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를 담고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식탁은 모습은 변했지만 새로 탄생한 화로와 함께 우리 곁에 남았다.

식탁은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들을 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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