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쓰는 사람으로 정해진 느낌이다. 잘 쓰는 사람인지, 혹은 못쓰는 사람인지 그건 모르겠으나 언제든 쓰고 싶고, 또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쓸 거리가 늘 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답답할 때나 무언가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면 나는 늘 글을 써왔고, 그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삶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도 강해서,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닐지라도 내가 만나는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삶은 바쁘게 돌아갔고, 나도 모르게 나는 마흔을 향해 가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린 것 같지만 매 순간순간이 나의 치열한 선택이었고, 또 그에 더해 운명이 만나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다.
인생은 다양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나는 내가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으며 안락하게 사는 것을 꿈꿔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늘 조금은 다르기를 원했고, 다르고 싶었고, 그래서 지금의 나는 생각보다 많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내 일생의 가장 인상적인 사건으로 써니의 탄생일 꼽는다. 첫째인 써니의 탄생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기에 나는 첫째의 탄생을 내 인생의 가장 특별한 경험으로 꼽을 것이다.
써니를 가졌을 때 나는 그렇게 태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을 살아갈 때 다른 사람의 시선에 너무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할 말을 할 수 있는 삶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한 건 아닌데, 정말 홀로 가는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아이의 발달에 대한 기본 지식 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관련된 학위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내 아이를 몰랐다. 아니 지금에 와 찬찬히 생각해 보건대, 나는 모른 것이 아니라 모르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는 유난히 물이 떨어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스스로 말을 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사물들에 대해 폭발적인 관심과 관찰을 하는 반면 사람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 외에는 얼굴을 익히려는 생각도 없었고,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손짓으로 표현했다 어린이집에 들어간 아이는 계속 높을 곳에 기어오른다고 했다. 나에게 그리고 써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나는 아직 자라나는 새싹이니 괜찮겠지, 조금 느리게 자라는 것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전문가에게 보이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이의 언어가 너무 늦어서 소통이 안 되는 게 어린이집 생활을 하는 아이의 걸림돌이 된다고 일단 치료 센터를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그래 언어가 조금 느리다면 그걸 좀 도와줄 수는 있지 하는 마음에 아이를 데리고 집 앞 센터를 찾았다. 내 아이를 데리고 가기 전까지 집 앞에 이러 발달 센터가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 4살의 아이는 조금씩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게 단번에 트이지는 않았다. 조바심에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발화 전문 센터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느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 아빠들을 만났다. 신체 발달도 늦은 아이, 소리를 지르면 마루에서 굴러 다니는 아이, 무작정 도망을 가는 아이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내가 교육 현장에서는 만나보지 못했던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함을 지닌 많은 아이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세상에 살고, 그 부모들이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그것을 핑계로, 또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느린 아이들에 관한 책을 읽었다. 자폐, ADHD, 발달장애에 관련된 유명 서적들과 대체 의학 요법, 놀이치료, 언어치료, 인지치료에 관한 자료들을 수도 없이 읽었다. 내 아이를 알고 싶었다. 내가 낳아서 내가 키우고 있는 나의 아이를 나는 알고 싶었고, 나는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그 사이 아이는 언어치료, 놀이치료, 감각통합치료 등을 받아가며 6,7세를 보냈다. 유치원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원장님은 이런 아이를 처음 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더 충격이었다. 센터에 가면 우리 아이 같은 아이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 아이와 같은 아이들은 일반 유치원에는 다니기가 힘들구나 하는 순간 내가 우리나라의 교육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물론 통합유치원도 있을 것이고, 특수유치원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딱 경계에 있었고, 조금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다행히 보조 교사를 한 명 더 두면서 아이를 같이 케어해 보자는 원장님의 제안이 있었고, 6개월 정도 그렇게 보내고 적응을 한 뒤 아이는 일반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다.
아이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끝이 없었다. 아이가 말을 잘할 수 있게 되면서 이 구멍은 막았다 싶으면 또 다른 아이들과 지내는 사회성이 뒤처지는 것이 문제라 또 그 구멍을 막아야 하고, 또 체육시간이나 무용시간에 동작을 따라 하는 것도 거부해 여러 번 마찰이 일어났다. 그렇게 여러 해를 보내면서 나는 선명하게 알아갔다. 우리 아이는 평범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나는 우리 아이를 사회 집단에 보낼 때 양해를 구해야만 하며, 앞으로도 이 아이에게 사회에 대해 가르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더불어 나의 멘털은 서서히 망가져 갔다. 나 스스로도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면서, 아이의 병원 진료를 다양한 곳에서 받았다.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 아스퍼거 증후군 그리고 ADHD까지 아이는 골고루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나 휘젓고 돌아다니거나 혼잣말을 하곤 했다. 8세까지 약을 먹이지 않다가 한 대학병원에서 9세에 ADHD약을 먹이기 시작하지 바로 불안이 더 올라와서 생활이 망가지고 아이는 자주 울었다. 그래서 또 다른 대학병원을 찾아가자 불안부터 잡아보자는 말씀을 들었고, 불안에 처방하는 리스페리돈을 밤마다 먹였다. 다행히 2학년 담임 선생님이 유연성 있게 잘 보살펴 주시고, 아이도 학교를 잘 다녔고, 3학년이 되자 오랜 시간 앉아있어야 하는 걱정에 다시 adhd약인 메디키넷을 처방받아 먹이기 시작했더니 학교 생활이 한결 수월해졌다. 물론 약물로 인해 잃은 것도 있었다. 아이는 메디키넷 복용 전보다 4개월 만에 6kg의 체중 감소가 있었다. 식욕이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오후 4시 까지는 거의 식욕이 없고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자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려 아이가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순간 너무도 부족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써보니 한 페이지로 정리가 된다. 나와 내 아이가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참 한 장으로 다 채울 수야 있겠냐마는 아이와 나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사회로 발을 내딛고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배웠다. 그러던 사이에 우연히 선물 같은 둘째가 생겼고, 둘째를 키우면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우리 써니가 얼마나 다르게 태어난 아이인지, 그리고 평범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매 순간 맞이하는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마음 한 구석에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고 있다. 사춘기가 되면은, 성인이 되면은 하고 센터에서 만나는 엄마들의 고민들을 나 역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반복해서 하고 또 한다 해도 결론은 하나다. 내가 걱정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거나 아이가 평범해지지 않는다. 내 아이는 특별하고, 내 아이는 다르다. 그리고 나는 평범함과는 다른 특별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다르게 태어났기에 소중하고, 또 우리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소중하다. 우리는 다르려고 태어났다. 다르다는 것은 특이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생명체가 지구를 살아가기 위해서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서 종의 보존을 위해서 염색체는 다양한 성질의 생명체가 탄생하도록 예견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 이는 자연의 커다란 생태계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왜 그렇게 다름을 혐오하고 심지어는 없는척하고 무시하고 살아가는가? 왜 그토록 다름에 대해 폭력적인가? 써니를 키우기 전 지난날의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내가 세상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는 없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앞으로 적어도 내가 만나는 교육 현장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다양함에 대해서 부단히 가르칠 것이다. 세상의 0.1%라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센터에서 만난 다른 엄마 역시 담임 선생님이 이런 아이를 만나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교육자로서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는 다양성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교사를 내 보내고 있다. 물론 다른 교육도 중요하다. 국수사과영어도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기둥이 되는 것은 스스로를 존중하고 타인도 존중할 줄 아는 그런 마음 자세다. 그것이 준비될 때 사회는 건강하고 서로는 존중받을 것이며, 바깥에 보이는 그 무엇보다도 내면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