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결혼생활을 했어도, 며느리는 늘 시댁을 방문할 때마다 긴장하고 약간은 초조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며느리들은 느낌으로 안다.
‘여기서는 나를 어여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안다.
시댁이라는 공간은 살얼음판과 같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균열이 가고,
조금만 강하게, 혹은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도 그 얼음은 깨진다.
그 아래에는 차갑고 깊은 물, 즉, ‘관계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며느리들은 그걸 본능처럼 느낀다. 그래서 늘 긴장한다.
언제 누가, 어떤 말로 자신을 찌를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사냥터.
그곳에서는 화살이 웃음 속에 숨어 있다.
방심하면 어느새 그 화살이 날아와 가슴을 관통한다.
피가 흐르지만, 너무 빠르게 지나가 아프다는 감각조차 늦게 따라온다.
지인의 언니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녀의 언니는 그녀에게 상견례 자리에 입을 옷을 사라며 돈을 건넸다.
겨울이라 동생은 그 돈으로 검은 코트와 원피스를 샀다고 한다.
며칠 후, 시댁에서 그 사실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상견례 자리에도 입고, 장례식에도 입으면 되겠네.”
그 말의 뜻을 음미하던 그녀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겉보기엔 농담 같았지만, 그 안엔 차가운 조롱이 숨어 있었다.
차라리 욕을 했다면 대응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비수처럼 은밀하게 마음을 베고 간다.
시댁이란 그런 곳이다. 직설적이지 않지만, 그 어떤 말보다 깊은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며느리를 시험하고 평가한다.
그들은 “나쁜 의도가 없었다”라고 말하겠지만, 그 웃음 뒤에는 우월감과 경계심이 섞여 있다.
며느리의 긴장감은 단지 예민함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관계의 역사가 몸에 새겨진 기억이다.
그 기억은 말한다.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들은 며느리의 조심스러움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말의 칼끝을 둥글게 만드는 사람이, 관계를 오래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타인을 웃음거리로 삼는 말, 그 사람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말과 행동에 대해 비꼬는 말은 악의의 가장 은밀한 형태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나는 나쁜 의도가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그 무의식의 바닥에는 우월감과 경계심이 도사리고 있다.
작고 조용한 조롱, 은근히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듣고 보아도 마음으로만 삼켜야 하는 자리, 그것이 며느리의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