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부부들은 다툼을 벌인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신혼 초부터 우리는 시댁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살았다. 그때의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 부부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남편은 회사일로 늘 바빴고, 퇴근 후에도 자주 시댁에 들르곤 했다.
주말이면 당연하다는 듯 시댁을 방문하거나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마주 앉아 대화할 시간도, 서로의 마음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댁과 점점 삶의 리듬은 공유하게 되었고 부부의 시간이 사라졌다.
다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 다툼의 본질은 우리 둘만의 사소한 감정싸움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시댁과의 거리, 반복되는 참견, 그리고 남편의 무게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피로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잦은 시댁 방문과 잔소리, 알게 모르게 섞여드는 간섭에 점점 지쳐갔다. 남편은 그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한쪽은 언제나 시댁 쪽으로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시댁에서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시댁의 눈치와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좋은 며느리, 좋은 아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러나 한 달에 적게는 9일, 많게는 13일을 시댁 식구들과 만나다 보니 우리는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 부부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감출 수 있었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 부부의 다툼의 원인이 “설마 우리 때문이겠어?”라고 조금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느 주말이었다. 남편은 역시나 집에 없었다.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고, 나는 식사와 간식들을 내드리며 어색한 침묵 속에 대화를 이어갔다.
시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최근 다툼이 있었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최대한 별일이 아니라고 둘러 댔으나 단호한 표정에 작은 일로 대충 포장해 말씀드렸다.
“별일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너희들이 이렇게 자주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걔(시동생)가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아.”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부부의 다툼이 도련님의 결혼 의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우리가 보여주지도 않은 부부다툼의 모습 때문에 도련님이 결혼 기피를 하고 있다는 것은 억지에 가까웠다.
그 말을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고 마음이 서늘했다.
“우리 부부가 자주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동생이 결혼을 안 하는 것 같다.”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투사였다.
이런 말은 대부분 자신의 불편함을 외부로 전가할 때 나온다.
아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소극적일 때, 그 원인을 자기 가족 안에서 찾기보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우리 집은 문제없다”는 믿음을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스스로의 책임이나 가정 분위기의 영향을 인정하기보다는, ‘형 부부의 잦은 다툼 때문’이라는 핑계를 만들어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았다.
즉,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무의식적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의 왜곡이며, 책임의 전가다.
도련님의 결혼 여부는 그 자신의 성향, 삶의 가치관, 경험의 문제이지,
누군가의 다툼 몇 번으로 결심이 흔들릴 정도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황당한 말은 며느리의 아들에게는 절대 하지 못한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본인도 잘 알기 때문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아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아예 그런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시어머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나에게는 그 말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그들 세계에서 며느리는 언제나 감정을 투사해도 되는 안전한 상대, 불편한 말을 던져도 되는 존재로 자리 잡아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 오랫동안 그 말을 떠올렸다.
화가 나기보다 허탈함과 피로감이 밀려왔다.
우리가 싸웠다는 사실보다, 그 싸움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원인’으로 몰아가는 시선이 더 상처가 됐다.
책임을 돌려서 평안을 얻는 사람은 결국 성장하지 못한다.
진짜 평안은 ‘누가 잘못했는가’를 묻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묻는 데서 온다.
시어머니의 불안을 우리 탓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했다.
우리 부부의 싸움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 누군가의 인생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런 황당한 말을 듣고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화를 낼 수도, 억울함을 풀 수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도,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자리.
그것이 며느리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