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집안 어른들은, 양가 모두 사돈의 안부를 묻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한다.
친정은 사위에게, 시댁은 며느리에게 어른들의 안부를 묻는 인사를 건넨다.
그 안부 인사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네가 너희 집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다.”라는 신호이자, 곧 며느리와 사위를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시댁도 친정부모의 안부를 자주 묻는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는 불편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시어머니는 늘 동서의 친정 이야기를 꺼냈다.
“걔네 엄마는 그렇다더라.”
“걔네 집은 어떻다더라.”
“걔네는 이러했다더라.”
처음엔 단순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들이 반복될수록 내 마음속엔 찬바람이 불었다.
내겐 엄마가 없다는 걸, 시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의 ‘엄마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 앞에서 꺼내셨다.
그건 마치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굳이 상기시키려는 듯했다.
나는 애써 “시어머니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라고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말들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빈도가 너무 많았고, 시어머니의 표정에는 미묘한 우월감이 섞여 있었다.
그 말속엔 부러움이 아니라, 묘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건 ‘너는 그렇지 못하지?’라는 비교의 언어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어머니는 동서의 어머니를 어쩌면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마도 그래서 나와 동서, 내 친정과 동서의 친정을 비교하고, 때로는 동서의 친정을 들먹이며 본인의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 애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그 비교 속에는 나를 향한 감정과, 스스로의 결핍을 감추려는 애처로움이 함께 배어 있었던 것 같다.
내 입장에서는 시어머니의 감정이 어떠했건 그건 결국 나의 삶을, 나의 가족을, ‘결핍의 가족’으로 규정짓는 말일뿐이다.
그렇다. 시어머니의 말에는 언제나 은근히 ‘나와 동서’를 비교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묻어났었다.
동서의 친정은 늘 풍요롭고, 든든하고, 다정하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덜 가진 사람’으로 자리매김됐다.
그 말의 끝에는 늘 무언의 메시지가 따라왔다.
‘그러니까 네가 좀 더 잘해야지.’
어쩌면 그분에게 나는 여전히 ‘모자란 며느리’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기준에서 봤을 때 ‘기댈 친정이 없는 여자’,
그 믿음을 유지하려면, ‘다른 며느리’의 친정을 더 높이 세워야 했다.
그 말은 사실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는 자조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그 감정을 직면하기보다 비교로 치유하려 했다.
비교는 그분의 무의식적인 방어였다.
그녀의 ‘친정 안부 묻기’는 단순한 관심이 아니다.
그건 관계의 권력 확인이었다.
누가 더 갖고 있는지, 누가 더 잘났는지, 그리고 누가 더 부족한지를 은근히 가늠하는 사회적 줄 세우기였다.
“(친정) 아버지는 잘 계시지?”
그 말은 단순한 안부의 말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너희 보잘것없는 친정 부모님은 잘 계시지?” 로 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 말이 정말 순수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인지 그 의도를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어쩌면 진짜 안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지난 시간 속에서 그녀의 말과 행동을 통해 친정 부모님에 대한 무례한 표현과 물음들이 자주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친정’을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곱지 않은 시선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 경험들이 내 안에서 친정에 대한 방어심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나는 시어머니의 그 어떤 안부의 말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어쩌면 나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마음이 여전히 그 말에 불쾌하다는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이다.
그 감정은 억지로 덮거나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진실한 반응이다.
결국 그 불편한 감정은, 시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흔적이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불신하게 된 결과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다.
말의 온도는 의도에서 결정된다.
진심으로 묻는 사람은 눈빛이 다르고, 비교하며 묻는 사람은 말끝이 다르다.
시어머니가 친정부모님 안부를 묻는 말끝에는 늘 묘한 자존심이 섞여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진짜 사실이 어찌 되었건, 나는 여전히 시어머니가 내 친정의 안부를 묻는 것이 단순한 관심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시어머니가 믿는 세계와 내가 느끼는 진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분이 내 친정을 언급한다는 것은 결국 내 존재가 여전히 그분의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교한다는 것은 곧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말하는 ‘동서의 친정’은, 결국 그녀 자신의 마음속 결핍이 드리운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며느리인 나는, 그 그림자와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