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본모습이 있다.
그 본모습이 때로는 추하게 느껴질 수도,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본능이다.
시기, 질투, 불안, 사랑, 화… 그것들은 결코 이상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감정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내면을 타인에게 드러내면 창피함을 느낀다.
들켰을 때는 부끄러워 숨기려 하고, 감추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특히 ‘며느리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시어머니들 중에는 ‘이중성’을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날카롭게 비난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일이 되면 “그럴 수도 있지”라며 합리화한다.
이런 이중성이 며느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한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했던 행동을 부정하며,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우기는 장면들은 며느리의 기억 속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을 여러 번 겪었다. 한 번은 시어머니가 분명히 하신 말씀을 나중에 전면 부정하며, “그건 네가 착각한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순간 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도 된 듯 얼어붙었다.
더 나아가,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시어머니 입으로 직접 말했을 때는 숨이 막혔다.
‘내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그때 느낀 것은 단순한 억울함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모멸감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시아버지 생전에 몇 해 동안 차례와 제사를 잠시 멈췄던 적이 있었다. 집안에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명절 음식을 준비하게 되었고, 나는 전기 피자팬을 꺼내놓았다.
그때 남편이 다가와 말했다.
“이거 왜 이렇게 더러워?”
그러자 시어머니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셨다.
“이거 예전에 며느리가 닦아 둔 거야.”
그 말에 남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사실 그 피자팬은 오랫동안 방치된 것이 사실이었지만, 내가 깨끗이 닦으려 하면 시어머니는 매번 “물로 닦으면 안 된다”며 말리셨다.
결국 나는 시키는 대로 마른행주로만 닦았다. 그 결과 팬은 점점 상태가 나빠졌다. 그런데 그 책임을 내게 돌리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 느낀 감정은 단순한 억울함이 아니었다. ‘이분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구나.’
자신의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가장 만만한 며느리를 희생시키는 모습. 그런 순간마다 나는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번 시어머니는 평온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그 표정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관계는 이미 경계를 넘은 관계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체면보다 감정이 앞서고, 감정보다 권력이 우선할 때, 그 관계에는 더 이상 인간적인 존중이 남아 있지 않다.
며느리는 단지 그 감정의 투사 대상일 뿐이다.
시어머니의 불안, 자존심, 비교의식이 모두 며느리에게 쏟아지며 며느리는 언제나 ‘감정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나와 타인의 경계를 지켜주는 마지막 울타리다.
그것이 사라질 때, 관계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다.
“가까움이 예의를 지워버릴 때, 관계는 존중을 잃는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문장을 내 마음속에 새겼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앞에서 부끄러움을 잃는 순간, 며느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는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존엄은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성숙하지 못한 언행을 마주하고, 그 부끄러움을 대신 느껴야 하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