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는 주례사의 순서가 반드시 있었다. 그 내용은 늘 비슷했다.
“두 분은 오늘부터 인생의 동반자로 새로운 길을 시작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힘들 때는 의지가 되고 기쁠 때는 함께 웃는 부부가 되시길 바랍니다.
가정은 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 고마워하고, 사소한 다툼도 대화로 풀어가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한다면 그 자체로 행복이 쌓여갈 것입니다.”
주례사의 이 말들을 나는 매번 흘려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 주례사 속에 가정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를 존중, 배려하고, 힘들 때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쁠 때는 함께 웃는 것. 작은 일에 고마워하고, 사소한 다툼도 대화로 풀어가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
이 말은 단순히 ‘둘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 말에는 대를 이어 행복해질 수 있는 특급 비밀이 숨어 있었다.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지내는 가정은 만족감이 높다.
다툼이 적고, 애정을 늘 느끼며, 원 없이 서로를 사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은 부모를 모방하며 안정된 정서를 갖게 되고,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그렇게 어른다운 남편이나 아내가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핍된 정서가 없는 부모는 며느리나 사위를 향해 질투와 시기심을 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유심히 바라봐야 하는 대상은 배우자이지, 자녀의 배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분들이다.
옛말에 ‘시집살이도 해본 사람이 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경험이 사람의 행동을 만들어 가듯, 시집살이도 대물림된다.
남편에게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외로웠던 아내는 아들과 딸에게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달라고 강요한다.
또는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어머니의 결핍된 정서적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무의식적 흐름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자녀는 더 이상 자녀라는 자리에만 머물지 못하고 어머니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자녀와 정서적 결합상태의 부모는 그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녀의 배우자인 사위나 며느리를 질투와 시기의 대상으로 삼아 괴롭히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렇게 자녀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결국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게 된다.
부모를 선택할지 배우자를 선택할지.
부의 대물림이 자본을 통해 이어진다면,
행복의 대물림은 애정을 통해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풀기는 쉽지 않다.
받지 못한 애정을 비열한 방식으로 요구하며 떼쓰게 될 뿐이다.
그런 악순환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가정이 겪고 있는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희생자를 만들고, 그 위에 세운 허상을 행복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불완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라도, 자신이 겪은 불합리를 자각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의 대물림을 이어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 가족은 그렇지 않다’며 안일한 믿음 속에 머물 때다. 그 착각 속에서는 끝없는 지옥을 맛볼 뿐이다.
그렇게 부모와 형제, 자매 사이는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제발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가정을 살펴보았으면 한다.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알아보아야만 비로소 곁에 머문다.
내가 선택한 인연과 함께, 그 행복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한다.
그 주례사 속 말처럼, 행복을 지키는 방법을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몽니가족도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