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두려워진다.
만약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진짜 정의가 아니라면,
나는 얼마나 편협하고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기준은 결국, 내가 겪은 경험과 감정적 재정립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정의는 보편적인가, 아니면 내 상처의 편에서만 옳은가?”
만약 먼 훗날 시어머니가 된 내가 나만 항상 옳다고 믿는 순간, 며느리와의 관계는 멀어질 것이다.
‘내가 옳다’는 말에는 언제나 ‘너는 틀리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 순간, 대화는 멈추고 마음의 문은 닫힌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정의를 의심해 보기로 했다.
내가 가족과 며느리를 대하는 마음가짐, 그 신념의 기준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가족 모두가 평안한가.
그 평안이 누군가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닌가를 살폈다.
누군가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평화라면, 그건 진짜 평화가 아니다.
둘째, 양보해야 한다면 어른이 먼저. 시어머니는 관계의 윗자리에 있으니
그만큼 더 넓은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어른의 양보는 체면의 손실이 아니라 관계를 품는 그릇의 크기를 드러내는 일이다.
셋째, 배려의 성질을 구분하기.
며느리의 배려는 타의에 의한 희생일 가능성이 크다.
시어머니의 배려는 자의적인 선택이며, 그 파급력은 훨씬 크다.
어른이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가정의 공기가 달라지고 마음의 질서가 회복될 거라 믿고 있다.
그러나 신념조차 쉽게 변하기도 하기에 경계를 더 섬세하게 세워야 한다.
내가 정의 내리지 않은 영역에서는 합리화의 이름으로 기준을 갈아 끼우게 될 수도 있다.
“이건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나는 어른으로서 도리를 다한 거야.”
이런 말속에는 옳음은 내가 만든 울타리다.
그 안에서 나는 안전하지만, 자식과, 며느리는 숨이 막힌다.
그래서 나는 내 신념을 절대화하지 않으려 한다.
정의는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 수정되어야 하는 생물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나의 신념이 며느리를 옭아매지 않도록, 나의 정의가 며느리의 상처를 덮지 않도록, 먼 미래의 나는 스스로를 항상 의심해야 할 것이다.
“진짜 성숙은 타인을 설득하는 힘이 아니라, 나의 옳음을 내려놓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옳음이란 이름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를 품고 살아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