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기대와 기준을 낮추면 작은 것에 행복하다.

by 마음벗

코로나 시기에 태어난 막내아이는 다른 형제들보다 말이 늦었다. 바깥출입을 조심하며 많이 경험하지 못한 탓이 컸다.

걱정이 앞서, 영유아 검진 날 소아청소년과 의사에게 조심스레 상담을 청했다.


언어치료 이야기가 나왔고,
다른 형제들도 대체적으로 말이 늦었다는 말을 전하자
“말이 늘어가는 것이 확연히 보이면 몇 달 기다려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하루가 다르게 말이 트였다.
어제까지는 ‘엄마’만 말하던 아이가 다음날 ‘엄마 이리 와’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이는 의사소통이 원활해졌고, 가끔은 어른스러운 말을 건네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 아이는 내게 천재였다.


여느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들이지만

나는 우리 막내가 이루어내는 발달 하나하나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듯 기준이 낮으니 모든 것이 감사하고, 작은 변화가 기쁨이 되었다.
행복은 ‘크게 이룬 결과’가 아니라
‘기대의 높이를 낮춘 순간’ 피어나는 것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첫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첫 시험을 보았다.
꽤 괜찮은 성적이었다.
나는 꿈에 부풀었다.
‘우리 아이 공부를 잘하나 봐!’

하지만 2학년 첫 시험에서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놀랍고 속상했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르고 물어보니 “신경을 많이 못 썼어.”라는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나는 내가 키운 커다란 기대를 내려놓았다.


기대는 높을수록 실망도 크다.
그래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음엔 좀 더 신경 써보자.”

그 이후 시험마다 성적은 서서히 올랐다.
나는 잘했다고 칭찬했고, 수고했다고 안아주었다.
아이도 부담 없이 자기 속도로 나아갔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도리도 결국 이와 다르지 않다.
기준이 낮을수록, 관계는 편안해지고 사랑은 오래간다.
낮춘 기준은 자식에게는 자유를, 부모에게는 평안을 준다.


효도와 죄책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부모에게 죄송해야 한다는 말.
그것은 정말 진심에서 나온 효도일까,
아니면 죄책감이 만든 굴레일까.

명절, 제사, 김장, 어버이날, 생신 어느 한 날이라도
사정이 있어 자식이 찾아뵙지 못하면 부모는 자식과 며느리가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여긴다.
꼭 그렇게 불편해해야 하는가?

아이가 아프거나,
며느리가 아파서 남편이 아이를 대신 돌봐야 하거나,
회사 일이 급하거나,
혹은 누적된 피로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부모에게 그것은 늘 “변명”이 된다.

왜일까?

“낳아줬으니 부모 마음대로여야 한다.”
그 신념은 오랜 세대의 도덕적 절대명제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도리’란 피로 맺은 계약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함께 만든 인간적 합의다.
모든 집에 같은 규범이 적용될 수는 없다.

결국 ‘효도’는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지, 죄책감의 사슬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도리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아닐까.

기대와 기준을 낮추면, 부모도 자식도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도리의 기준 또한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서로의 온기가 다시 느껴진다.


하지만 도리를 악용하는 부모들도 있다.

세상에는 ‘도리’를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는 부모.

“부모니까 네가 해야 한다.”
“자식이니까 당연하지 않니.”

이 말들 속에는 요구는 있지만, 존중은 없다. 도리라는 이름으로 자식의 자유를 억누르고,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자식의 내면을 침묵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의 불합리함을 이해해야 할까?

도덕이란 본래 ‘관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약속이다.
한쪽의 희생만을 전제로 한 도덕은 이미 왜곡된 윤리다.


도리를 악용하는 부모는,
자신이 베푸는 사랑보다 받아야 할 권리를 먼저 주장한다.
그 순간 ‘부모’라는 자리는 사랑의 자리에서 권력의 자리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리’라는 말 앞에서 질문해야 한다.

“이 관계에 사랑의 상호성이 있는가?”
그 답이 ‘없다’ 면, 그건 더 이상 도리가 아니라 통제다.
그럴 때의 도덕적 판단 기준은 ‘효’가 아니라 인(仁)이다.
서로의 마음을 해치지 않는 선, 그게 진짜 도리의 경계다.


“도리를 가장한 강요는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이다.”
“진정한 효는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되 나의 삶을 지키는 것이다.”


내가 느낀 도리 강요, 심적 동요의 절정의 지점이 있었다. 바로 남의 자식과의 비교다.


남의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도리를 내 자식에게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 도리는 애초에 내게로 흘러오는 것이 아니다.

내 기준이 낮으면, 나는 언제나 자식과 며느리에게 만족한다.
자식과 며느리가 내게 보이는 작은 모습 하나하나에 굳이 점수를 매길 필요도 없다.

매번이 최고라 여기면, 나는 매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리의 기준을 낮추고, 기대는 내려놓으며, 나의 자식과 며느리만의 방식으로 흘러가는
그들의 도리를 존중할 줄 아는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


“남의 자식이 하는 효도를 내 자식의 기준으로 삼지 말자.
내게로 오지 않을 도리까지 욕심내면, 결국 상처는 내 몫이다.
기준을 낮추면 매 순간이 최고가 되고, 그때부터 행복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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