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 새로운 선택으로 시작된 두 번째 어학연수
내가 선택한 두 번째 어학연수지는 리옹이었다. 한번 지내봤던 생테티엔과 같은 론알프 지방이라 마음이 더 끌리기도 했고, 이번엔 무조건 도시로 간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리옹이 최적의 장소였다. 마치 야구선수의 징크스처럼 무조건 생테티엔과는 모두 다 다르게 선택했다. 그렇게 하면 유학원에서 정해준 대로 가는 것이 아닌,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어학연수가 될 것 같았다.
어학원도 사립이었다. 그래서 국립처럼 9월 정규 학기에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매달 개강하는 시스템이라 4월부터 들어갈 수 있었다. 생테티엔에서 시시콜콜한 문제에 시달렸던 기억이 있는 기숙사도 싫었다. 내가 선택한 어학원은 프랑스인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사업체였고, 나는 원장의 사촌인 임원이 내놓은 아파트에 어학원을 다니는 기간 동안만 지낼 수 있었다. 처음엔 그런 제한 기간을 전제로 나에게 집을 임대해 준 것도 몰랐는데,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프랑스는 원래 집을 구하려면 대개 보증금 외에 '보증인'인 필요하다. 이 집은 내가 그 어학원에 등록한 학생임을 감안해서 그런 조건 없이 빌려준 것이었다. 대신 등록 기간 동안만!
집은 편하면서 불편했다. 넓은 면적은 혼자 여유롭게 살기 충분히 좋았다. 그러나 기숙사가 아니다 보니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 인프라에 대해서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위치가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보니 어학원까지 통원하는 과정도 꽤 심심했다. 리옹은 중심에 강이 두 개나 흘러서 경관은 예쁘지만, 그것도 맨날 보니 그저 익숙해졌다. 집은 리옹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고, 교통편은 퓌니퀼레르(funiculaire)라고 부르는 케이블카였다. 파리에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몽마르트르 언덕을 올라가는 철도를 알 것이다. 바로 그것과 같은 교통편이었다. 나는 그걸 관광객들과 함께 타는 게 너무 번거롭고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걸어 다녔다. 그 해 여름은 리옹이 이상기후로 40도까지 오른 때였다. 그때도 걸어 올라갔다. 어쩐지 그때에 살이 안 붙었다. 강제적인 운동루틴이라도 생긴 셈이었다.
사립 어학원은 생테티엔의 국립 어학원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학교 같았던 국립에 반해 사립은 그냥 학원 그 자체였다. 엄청나게 자유로웠고 어떻게 보면 무질서했다. 가르치는 강사들도 프랑스어권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 실력이 안되어도 얼추 어학원에 오래 다니는 학생은 반을 올려주었다. 그놈의 게임은 왜 그렇게 자주 하던지! 처음엔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곧 내가 바라는 학습 환경과 거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좀 더 엄격하고 체계적인 환경이 나에게 맞는다는 걸. 자유롭고 무질서한 사립 어학원의 분위기보다는, 국립 어학원처럼 엄격하고 학문적인 틀 속에서 배우는 것이 내 성향에 더 잘 맞았던 것이다. ‘규율’과 ‘구조’가 오히려 나를 더 집중하게 만들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줬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았다.
어학원에서는 아시안이 많았다. 이렇게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상황에 같은 국적의 사람이 많다는 것은 큰 장점과 큰 단점이 있다. 일단 친해지기 편하고 가까워지면 심심하지는 않다. 무언가를 같이 할 사람도 많다. 선배로부터 전해지는 상당한 양의 정보가 돌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잘 스며들어 지내기 수월해진다.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프랑스어가 정말 더디게 는다. 편한 언어를 쓰며 편한 사람들과 함께 하니 당연한 결과다. 그 단점 때문에 새로운 한국인이 어학원에 더 들어오면 경계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학원 측에서는 돈 내고 등록한다는 데 국적을 가릴 이유가 없고, 그 학원에는 이미 한국인이 넘치게 있었다. 사실 리옹 자체에 한국인이 많기도 하다. 적대적인 분위기를 첫날 읽은 나는 같은 학원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친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내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프랑스의 생활에 대해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혼자 지내도 행정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생테티엔에서 한번 해봤던 것들을 다시 복습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생활이 재미가 있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당연한 일상들을 또 조금씩 잃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학원도 재미있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다시 자문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거의 매일 같은 메뉴의 점심을 먹고 그렇게 쳇바퀴 생활을 몇 주 보냈다. 그래도 아직 그때까지는 ‘적응 기간'이라는 마음으로 이걸 그다지 위험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 익숙한 패턴을 반복하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나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지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익숙한 환경인 한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안 해봤던 선택들을 하고, 새로운 상황에 놓이면서 나를 차츰 더 알아가는 시기였다. 나는 늘 자유가 있는 환경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걸 더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타지에서 그렇게 지내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원했지만, 사실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마음이 편하다는 걸 느끼고, 사람들과의 소통과 관계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