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아, 생일 축하해. 스크린으로 널 스물몇 번 봤을까. 내 주변에는 80번씩 본 사람도 있으니… 긴 말은 하지 않을게! 몇 달 동안 돌비관이니 아이맥스관이니 컬러리움관이니 온갖 특별관을 뒤지면서 똑같은 영화를 한참 봤다, 그치?
첫 번째 회차부터 네가 눈에 밟히더라. 영화의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만, 네가 가진 슬픔, 서글픔, 절절한 죄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는 다정함, 그런 게 나를 눈물 나게 했어.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집에 와서 너의 이름을 검색해 봤어. 너의 일본어 말투가 생각보다 다정하고 상냥하다는 내용을 보고 마음이 무너졌던 것 같아. 네가 형을 죽인 것 같으면 그렇게 드리블을 하러 뛰어 나가고, 형을 감히 보고 싶어 할 수도 없을 때는 그냥 뛰고, 또 달리고… 형이 너무 보고 싶을 때는 지나가는 바람으로 형의 체온을 느끼고, 말도 걸어보고. 너는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영원히 자라지 않는 형의 빈자리를 절절하게 느끼면서, 또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않고. 내가 태어난 날을 온전하게 축하받을 수 없고, 가끔은 내가 형을 죽음으로 내몬 것 같아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어서… 너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도, 슬프게도 했어. 나는 내 안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해서 못돼먹고 미워졌는데,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동생을 사랑하고, 정대만을 용서하고, 치비를 농구를 더 사랑하고… 정말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마지막 회차로 갈수록 더 눈물이 나더라. 어찌나 오열파티를 하면서 영화를 봤는지! 최애의 고통과 슬픔의 깊이를 보면서 눈물을 그칠 수 없는 오타쿠의 심경을 태섭이 너는 알려나 모르겠다!! 볼 때마다 다른 대목이 슬프더라. 서로 다른 감정이었어. 처음에는 너라는 사람의 죄책감과 자기혐오가 나를 덮쳐서 눈물이 났다가, 다음번에는 그런 애가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났다는 게 너무 북받쳐서 또 엉엉 울었고. 마지막 회차에서는 너의 이야기가 가진 서사적 아름다움에 눈물이 나더라.
초반에는 오키나와의 해 지는 모래사장을 달리는 네가 제일 기억에 남았어. 그러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너의 웃음을 마음에 박아 넣었다. 마지막 골을 넣은 태웅이와 백호에게 달려와 작은 키로 콱 매달리는 태섭이를 생각해. 이제야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그 눈동자에 눈을 맞추고, 행복할 거라고 말해줬어. 태섭아, 너는 행복할 거야. 아니, 평온하겠다. 고독도, 고통도, 미움도, 원망도 뒤로 하고 그냥 걸어 나왔으니까. 너는 그걸 해냈으니까. 보란 듯이도 아니고,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매달린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지나 보냈으니까. “살아남은 게 저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계속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형의 목표를 이뤄주겠다는 것으로 다시 농구에 대한 열망을 되찾고, 그것으로 삶에서 한 발짝 나아가는 사람. 돌아가신 아버지부터 형의 죽음이라는 무게,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기댈 곳 없던 너의 텅 빈 외로움까지 인생이 존 프레스였던 아이.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의 응원이라면 그걸 뚫고 나올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네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는 서사가 너무 아름다워. 이건 너의 삶의 이야기니까. (다른 의미로, 산왕의 에이스 우성이에게 필요한 경험이 바로 패배였고, 우성이는 미국으로 떠나기 때문에 그 패배를 설욕할 수 없다는 완결성도 너무나 좋아해. 태섭아, 우성이랑 미국에 가서는 좀 친해졌니?) 그렇지만 만약 그게 안 되었어도, 너무나 완벽한 산왕에게 패배했더라도 태섭이는 결국 해냈을 거야. 뚫고 나왔을 거야. 그 해 겨울, 그게 아니면 그 내년의 여름, 그것도 아니면 그 겨울에라도. 윈터컵에서라도, 그게 안 되면 그다음 해의 인터하이에서라도, 그게 또 안 되었다면 고등학교의 마지막 윈터컵에서라도 해냈을 거야. 이건 너의 성장기니까.
어머니를 보호해 줄 수 없고, 자신이 닮을 수 있는 아버지나 형을 모두 잃은 채로 가장이 된 너. 가끔 자신을 찾아온 형의 그림자에게만 말을 걸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에게 다정할 수 있는 오빠. 후배가 자신에게 ‘료칭코’라고 불러도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기다렸다, 문제아. 우리 같이 뒤집어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선배. 폭력 양아치 정대만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씨. 치수를 ‘주장’이라고 부르고, 자기가 주장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미국 땅을 밟는 아기 대장. 키 작은 ‘치비’에게는 드리블만이 살 길이라고, 드리블 한 길만을 묵직하게 파는 사람. 속도도 체력도 스피드도 절대 뒤지지 않는 꼬마. ‘도망치고 싶어.’라고 말하지만 결국 경기가 끝나기 전에 해결방법을 찾아내는 무대의 주인공. 가방끈을 이마에 걸고 다니고 오토바이도 타지만 자신을 바다에 냅다 빠뜨리는 동생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오빠. 긴 세월 동안 서로 안아준 기억이 없지만 이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엄마와 아들.
태섭아,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정말 세상을 원망하느라 너무 바빴는데, 너는 어떻게 그걸 다 지나 보낼 수 있었을까. 너에게 농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좋아하는 것 하나를 위해서 매일을 뛰고 달렸던 너의 하루하루를 사랑해. 그냥 그런 네가 너무 좋다, 태섭아. 너 덕분에 나도 하루하루의 파도를 그저 가볍게 타 넘을 수 있게 될 것 같아.
태섭아. 사실 어제는 내 생일이었어. 그리고 오늘은 너의 생일이네. 왜 생일에 들뜬 기분은 생일 다음날 가라앉기도 하잖아. 뭔가 쓸쓸하고, 공허하기도 하고. 그런데 앞으로 영원히 나의 7월 31일은 다정하고 눈부실 것 같아. 너를 사랑하게 되어서 오늘 하루가, 앞으로도 영원히, 아름답네. 너의 7월 31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형을 생각하면서도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
우리 치비, 브로콜리, 깔롱보이, 북산의 주장, 우리 7번, 쪼꼬푸들. 송태섭. 사랑하는 태섭아. 생일 축하해. 너의 죄책감은 공기처럼 흘려보내고 이제 가벼워졌기를. 사랑하고 사랑받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