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지 않는가.
일기라는 것은 혼자 보고 혼자 쓰라고 있는 것이지만.
초등학교 방학 숙제를 선생님에게 검사 맡듯, 남들 다 보라고 쓰는 일기라니.
서른이 된 나이에 말이다.
내가 이걸 굳이 이렇게 쓰는 이유가 있다. 가난과 폭력에 노출된 어린 나무들이 볼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왜라고 명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나에게 그들과 같은 과거가 있었던 것은 내가 이런 글을 써내게 한다. 그들을 도와야 할 명분이나 사유는 없다. 그들에게 돈을 받는 것도 아니다. 빚을 진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의 눈동자에 드리워진 그늘은, 서른이 된 지금의 내 동공에도 남아있다. 이것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았던 이들은 무덤에 들어가서도 이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떠한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며, 다른 관점에서의 설명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양 부자들 사이에 오가는 한 격언이 있다.
'날개가 부러진 새를 고쳐주지 말라. 그들은 결국 손 품 안에서 죽거나, 낫게 되어도 날아가 버릴 것이다.'
나는 모든 생명력을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는데 산화시키고 있다. 희생과 포기를 반칙 없이 감내하고 있다. 지난 3월 달력을 보니, 하루도 일을 쉰 날이 없다. 자부심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앞으로의 고생길도 지금 내 손가락 밑 자판처럼 아주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5년 정도 지금의 개고생을 해야 일정 수준의 독립을 득할 수 있으리라 산술적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 10년을 지나왔다. 나의 20대는 무어라 형용하기가 어렵다. 한 인간의 존엄성이 가난에 의해 어느 한계선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경험해 본 시기였던 것 같기는 하다.
나 역시 '날개가 부러진 새'였다. 나를 품어 주었던 마음씨 좋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계셨다. 나를 품어 주었던 동네 지역 유지 집안도 있었다. 솔직하고 싶다. 나는 내 앞가림하기가 바빠서 그들을 뒤로하고 날아가 버린 새가 되었다. 그들에게 은혜를 제대로 갚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목표한 지점까지 도달하고, 조금은 살만해지더라도 그들을 다시 찾아뵐 수 있을는지 의심된다. 왜냐하면 그쯤 되면 낯을 비추기조차도 너무나 미안해지는 오랜 시간적 괴리가 생겨버릴 것이니.
그렇다.
나는 나의 글을 보고 어떠한 도움을 얻는 가난한 아이들이 날개를 고쳐붙인 채, 나에게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고 훌쩍 날아가버렸으면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선물이다. 죄책감을 덜 수 있게 해주는.
이제 본문을 시작해 볼까.
어떠한 인간이 작은 사자가 되기 위해, 진정 마음을 매섭게 잡게 되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다. 첫째는 고통이고 둘째는 고독이다.
고통은 무에서 유를 창출해야만 하므로 따라온다. 그저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부자의 위치에 도달하는 것은 망치 하나와 나무를 가지고 집 한 채를 짓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가난과 폭력 속에서 태어나 부자의 위치에 도달하는 것은 비가 세차게 오는 곳에서 맨손과 진흙으로 집을 지어보려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다.
진흙은 세찬 비를 맞으면 씻겨 내려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미친 짓거리이다.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 정신병 환자가 되어야 한다. 자폐증 비슷한 것에 스스로 시달려야 한다는 의미가 가장 적절한 설명인 것 같다. 인간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증상을 자폐증이라고 한다.
determined. 결의에 찬 자폐적 집념에 의해 가장 하기 싫은 일, 가장 위험한 일로 스스로를 한계까지 내몰게 한다.
나는 자산의 대부분이 증권에 투자되어 있다. 주 평균 근로를 하는 시간은 60시간 정도 되는 것 같고, 근로 이외의 시간에는 이처럼 글을 쓰거나 출판을 준비하며 밤이 오면 해외 주식을 모니터 한다. 그러니까 쉬는 시간이나 쉬는 날이 없다. 쉬는 시간이나 쉬는 날이 없으면 논다는 게 없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도 구멍난 바지에 구멍난 걸레 같은 운동화로 일터를 나다닌다. 옷을 사본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고통만이 있으며, 나는 그것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을 고집하면, 친구고 여자고 떠나는 법이다. 이것을 옆에서 봐주고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그리고 그중 여자는 한 명도 없다.
그래서 고독이 오게 된다.
고독이라는 것은 사람을 독하게 만들기도, 어느 부분은 병이 들게도 만든다.
나는 깨달으려고 노력한다. 생각한다. 이 같은 고통과 고독을 받아내면서도 글을 쓰고 있고, 또 다른 아침해가 뜨게 되면 어김없이 일터로 발걸음을 향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조금씩 알게 된다.
나 안 죽고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담뱃불을 붙이고 들숨 날숨 한 뒤, 카페인 한 모금 넣고 또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 누구에겐들 강력하다.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를 보내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도 길은 이 길 뿐이다. 예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긍정이나 동기부여, 미라클 모닝, 끌어당김 법칙을 믿지 마라. 그러한 개념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한낱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의 장르는 누아르이며, 고통과 고독을 정직하게 감내해야만 값이 돌아오는 것 같다. 적어도 내 삶은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니 가여운 이들이여. 어떠한 미련을 버리기 바란다. 그 모든 것은 헛물을 켜게 될 테니.
이 길을 구태여 가겠다는 나 같은 성질 더러운 놈들이 또 있다면, 어차피 죽을 거 당당하게 들어와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생각을 하라. 최대의 고통, 최대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에 의해 패배하게 될 것이고, 철학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 관성을 가지고 20년 이상을 거쳐오면 우리는 한 마리 동물적인 맹수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