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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Mar 07. 2024

낮 거미는 복이라는 말이 미신일지라도

오늘도 오전에 정신없이 바빴다. 일하다 보니 어느새 1시가 훌쩍 넘어갔다. 한숨을 돌리고 창밖을 보았다. 밖에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3월이지만 봄기운을 느끼기에는 아직 쌀쌀했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만 해도 추워서 목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나갔다. 병원 내에서야 종일 히터를 틀기에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히터가 만든 공기는 따뜻하지만 건조하다. 공기가 갇혀서 순환하지 못하기에 유해 물질도 발생한다. 문득 모두의 건강을 위해 환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점심 먹으러 나갔다.      


밖에 나오니 날이 확실히 풀렸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봄이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의 메뉴는 닭가슴살 샐러드다. 요새 매일 샐러드 가게에 간다. 겨우내 부쩍 살이 올라 옷 대부분이 작아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살을 빼려고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한 달을 넘게 먹었는데 아직 1kg도 빠지지 않은 걸 보면 전혀 효과가 없다. 대신 다른 좋은 점을 발견했다. 샐러드를 먹으면 몸이 가뿐하다. 소화가 잘되고 속도 편하다. 계속 먹으면 최소한 살이 더 찌지는 않겠지 싶다. 당분간 계속 샐러드 가게에 단골 도장을 찍을 예정이다.      


샐러드를 먹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아직 남아 식사 갔다가 돌아온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아까 창문을 전부 열어놓고 나갔더니 실내 공기가 차가워졌다. 오후에 오는 환자들이 추워할까 봐 얼른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하나씩 닫았다. 마지막 창문을 닫는데 창문 아래 하얀 창턱에 1~2밀리쯤 되는 작은 검은 점이 보였다. 먼지인 줄 알고 털어내려다 멈칫했다. 자세히 보니 먼지가 아니라 몸을 움츠린 채 꼼짝 않고 있던 새카만 거미였다. 늘 청결해야 할 병원에서 거미라니. 누가 보기 전에 빨리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빨리 책상에 있던 티슈를 한 장 뽑아서 가져왔다. 티슈를 반으로 접고, 손을 뻗다가 순간 주춤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 거미는 죽여선 안 돼. 낮 거미는 복이거든. 밤 거미는 죽이는 게 좋아. 밤 거미는 흉조야. 그러니 낮 거미는 살리고, 밤 거미는 죽여야 한다.”     


어릴 적 할머니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문지방을 밟으면 복이 나간다든지. 밤에 손톱을 깎으면 재수가 없다는 식의 얘기였다. 지금에야 그런 말이 미신이라는 걸 알지만, 어린아이는 원래 스스로 상황을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 어린 나는 할머니 말씀이라면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거미에 관련된 말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미를 죽이는 건  꽤 께름칙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낮이 아닌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거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손님(?)은 크기가 너무 작다. 창밖으로 보내려고 티슈에 싸거나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최소 사망 또는 다리 몇 개가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겠다. 잠시 그 자리에서 고민하다가 티슈 모서리로 거미를 창틀 쪽으로 최대한 밀었다. 거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거미가 제 발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문을  닫지 않고 살짝 벌려 놓았다.      


곧 직원이 전부 들어왔다. 오후 시간도 정신없이 흘러갔다. 마침내 퇴근 시간이 되어 다들 떠났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나가기 전 아까 열어놓았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거미가 있던 창턱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미는 무사히 창밖으로 빠져나갔을까? (아니면, 이곳 어딘가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을까?) 이젠 알 수 없다.      


낮 거미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미신은 터무니없다. 처음부터 과학적인 근거가 없기에 인과관계를 따지는 일도 부질없다. 불교에서는 미물조차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설파한다. 어쩔 수 없이 해충을 죽였으면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진언을 하기도 한다. 범인(凡人)이 수행하는 스님의 삶을 전부 따를 수는 없지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꼭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필요한  삶의 기본자세이다.


요즘 집은 문지방이 없어 문지방 미신은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며칠 전에도 밤에 손톱을 깎았다. 어른이 된 후 대부분의 미신은 그저 웃고 넘기는 일이 되었지만, 오직 한 가지 미신만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때론 종교나 과학을 따지지 않고 그냥 믿고 싶은 게 있다. 그 믿음이 그리운 할머니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는 길이라면. 미물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일이라면.      


거미는 언제까지나 내 인생의 손님으로 남을 것이다.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 #갑분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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