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예상대로 아침밥은 전날 멕시코 식당에서 싸 온 치폴레였다. 밥을 먹고 가만히 앉아 넷플릭스에 뭐 볼 게 없나 찾아보다가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가지고 온 노트북을 꺼내 여행 중 처음으로 켰다. 소중한 추억이 될 이번 여행을 복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억을 여행 출발일로 옮겨 놓고 키보드를 눌러가며 글자를 시간 순서대로 배열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글이 안 써져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글 쓰는 사람이란 말이 안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그 말이 무색하도록 꼼짝하지 않고 손만 놀리는 경험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한글 문서가 7페이지를 넘어 8페이지로 넘어갔다.
셀린이 거실에 나와 뭘 하느냐고 물었을 때는 글에 완전히 빠져 있는 상태였다. 시계를 보았다. 정오가 조금 지나 있었다. 오늘은 뭘 할지 얘기하다가 혹시 근처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는지 물었다. 잠시 후 셀린이 차로 15분이면 가는 미술관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셀린이 평소 자주 가는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정작 셀린은 그 공원에 미술관이 있는지 전혀 몰랐었다고 말했다. 셀린은 이번 기회에 자기도 동네를 탐방하는 기분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차를 몰고 바로 미술관으로 갔다. 미술관에는 메릴랜드에 사는 아티스트들의 그림과 특별 기획으로 문신 아티스트들의 문신 작품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역 미술관이라 그런지 실내가 한산했다. 관람 중에 오직 백인 노인 한 커플과 마주쳤을 뿐이었다. 1900년대 그림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내가 아는 화가는 없었다. 유명한 그림이 없었기에 오히려 모든 작품을 편견 없이 기분 닿는 대로 볼 수 있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을 만나면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나오는 길에 셀린이 문 앞 데스크에 있던 직원에게 얼마나 자주 전시가 바뀌는지 물었다.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바뀌며 새 전시는 8월이 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나라를 떠나고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괜스레 아쉬움이 올라왔다.
미술관을 나와 그린브리에 주립공원(Greenbrier State Park)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셀린이 해변(beach)을 검색하다가 찾은 곳이었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빗발이 굵은 비가 내렸다. 우리는 비가 곧 그치기를 바라며 천천히 공원 입구로 진입했다. 들어가는 도로 한가운데에 지폐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양철 상자와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셀린이 안내문을 읽어보더니 입장료를 내야 한다며 3달러를 꺼내 양철 상자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키는 이 하나 없는데 꼭 돈을 내야 하냐고 물었다. 셀린은 보이지는 않더라도 직원이 어디선가에서 우릴 보고 있을 수도 있고, 만약 돈을 내지 않고 지나치다 나중에 벌금 고지서를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비양심적인 발언을 한 게 좀 겸연쩍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사이 차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해변처럼 생긴 곳이 보였다. 우리는 차 안에서 비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다행스럽게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차에서 나와 해변 쪽으로 내려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해변이 아닌 호수가 있는 야영장이었다. 한쪽에는 나무 테이블과 벤치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거의 모든 테이블이 이미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호숫가는 고운 모래가 바닥에 깔려있어 진짜 모래사장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인공적으로 모래 해변을 만든 게 아닌가 짐작했다. 수영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우리는 비어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얼른 다가가 앉았다. 차에 미리 챙겨 온 수영복이 있었지만, 비 온 뒤라 기온이 생각보다 내려간 상태였다. 우리 둘 다 감기에 걸릴까 봐 물에 뛰어들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한참을 앉아서 수영하는 사람들만 구경하다가 그곳을 떠났다.
돌아가는 길에 셀린과 인도 식당에 가기로 합의했다. 이번에는 셀린의 추천이 큰 영향을 발휘했는데, 그중 나를 가장 자극한 점은 ‘꽤 매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김치 먹고 자란 한국인이 매운맛을 무서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넘치는 자신감을 표출하며 곧바로 인도 음식을 경험하러 출동했다. 셀린은 이번에도 리뷰가 괜찮은 인도 식당을 찾아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은 다섯 테이블이 전부인 작고 아담한 규모였다. 우리는 마늘 난과 치킨 티가 마살라(Chicken Tikka Masala), 치킨 비리야니(Chicken Biryani)를 시켜 함께 먹었다. 음식의 양이 예상보다 많아 결국 절반 이상 포장해 왔다. 나는 씩 웃으며 내일 아침을 또 챙겼다고 말했다.
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셀린이 오늘 밤에는 영화 <바비>를 보자고 말하며 체리블로섬 스파클링 와인(Cherry Blossom sparkling wine)을 꺼내왔다. 상큼한 과일 향이 나는 와인은 톡 쏘는 맛으로 혀를 즐겁게 했다. 이미 두 편의 애니메이션을 전혀 졸지 않고 본 나는 어느새 영어 듣기에 꽤 많은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두말없이“오케이!”를 외쳤다. 약 2시간 지났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화면 밖으로 떠나는 걸 지켜보며 내 영어 자신감과도 함께 이별했다. 이 집에서의 마지막 밤이 포근한 담요로 그런 나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