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구차투성이
라라크루 수요질문. 첫사랑의 기억.
첫사랑은 구차스러웠다. 삶지 않은 풋콩처럼 콩 비린내가 가득해 퉤퉤 뱉어버리고 싶은 이야기로 넘쳐났다. 스물네 살의 우리는 사랑한 만큼 많이 싸웠다. 그의 삶이 마치 내 것인 양 간섭했다. 그는 어딜 가든지 내게 보고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내 말을 안 들어주면 사랑이 아닌 줄 알았다. 그의 작은 잘못에도 큰 범죄를 지은 것처럼 유난을 떨고 섭섭해했다. 다시는 안 볼 생각에 그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자루가 없는 칼을 그러쥔 것처럼 그에게 상처를 낼 때마다 나도 다쳤다. 헤어지자고 말하고 일주일도 못 버티고 그의 품으로 달려갔다.
그는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혼한 아버지의 삶을 따라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서도 나를 마누라라 불렀다. 그가 불러준 호칭은 마약처럼 황홀하고 중독적이었다. 자꾸만 그와 함께 할 미래를 그렸다. 착각에 빠져 진짜 부인처럼 굴었다. 그는 그걸 참지 못했다. 사랑과 이별의 반복은 뻔한 결말을 불러왔다. 결국 그는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 차라리 내가 몰랐던 여자였다면 참담함이 좀 덜어졌을까. 그는 나의 친구와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그와 다섯 번째 이별한 직후의 일이었다.
사랑과 우정을 둘 다 잃고 남은 자의 삶은 비참했다. 이별과 배신의 아픔이 거대한 화마가 되어 온몸을 휩쓸었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끊임없이 되뇌었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내 잘못만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이별 노래는 내 눈물과 연결되었다. 누수로 곰팡이가 번진 방의 벽지처럼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친구들은 그런 나쁜 놈은 잊어버리라 했다. 그를 잊을 수 없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 하루가 고통이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처음에 별말이 없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가 기르던 고양이가 자꾸 내가 그립다고 울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그 목소리에 기뻐하는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이 싫었다. 목을 비틀어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말했다. 한 번 더 전화를 받으면 그때는 정말 못 견딜 것 같다고.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무게에 가슴이 짓눌렸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거란 걸 알았기에 한마디라도 더 해야만 했다. 내 소중한 친구에게 잘해주라고 말했다. 먼저, 전화를 끊었다.
겨우 진정되었던 마음에 검은 잉크가 쏟아졌다. 밤보다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을 눈물로 지우려고 헛수고하며 밤을 지새웠다.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가벼운 만남만 가졌다. 처음 본 남자와 키스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교감하지 않는 관계는 관계라 부를 수 없었다. 한 해가 지나도 그가 다시 연락하는 날을 상상했다. 상상은 다양한 방향으로 흘렀다. 배신한 옛 애인에게 복수하는 여주인공처럼 매몰차게 그를 거절할 때도 있었지만, 어떤 날에는 동네 성당을 지나칠 때 보았던 인자한 마리아상처럼 그를 받아주었다. 모든 상상은 눈물로 통일되었다.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일에 몰두했다. 퇴근 후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일 년에 백 권이 넘는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지만, 기껏해야 한두 달에 한 권 남짓 보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일 년 동안 50권의 책을 읽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치 기록을 세우려는 운동선수처럼 책을 쌓아가며 읽었다. 그때 보았던 책 중 한 줄의 문장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단지 책에 들어가 있을 때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어서 좋았다.
아픔의 끝에는 공허함이 달려있었다. 공허함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없었다. 쓸쓸했지만 마음에 평화가 배어들었다. 눈물이 조금씩 줄어들다 마침내 말라붙었다.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의 시답잖은 농담에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정신이 흐릿해져도 더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취할 때마다 전화하고 싶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손도 그를 잊었다.
수영을 시작했다. 미래를 위해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모은 돈 일부를 써서 친구와 필리핀으로 첫 해외여행을 갔다. 거기에서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를 깨달았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얼굴에 한 송이 생기가 돋아났다. 첫사랑은 아름답지 않았다. 이별 후에는 온갖 청승을 다 떨고 궁상을 피웠다. 외로움의 바닥까지 밟은 기분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자 빛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었다. 나의 가치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고 중얼거렸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새로운 사랑에게 내가 중요하다 믿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의 부분이 있어도 인정했다. 사랑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홀로서기를 했다.
첫사랑은 더없이 구차스러웠다. 스물네 살에 사는 건 원래 구차투성이라는 걸 배웠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수요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