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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내는 미움. 들이치는 사랑

by 안희정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젖어버린 마음이 처량해 견디기 힘들었다. 유난히, 위로가 간절했던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더니 딸이 달려 나와 맞이해 주었다. 아이를 보자마자 꼭 끌어안았다. 잠시 후 딸이 말했다. "여기까지. 엄마 지금 손이 너무 뜨거워. 덥단 말이야."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아서 등을 토닥거리면 품 안에서 스르륵 잠이 들던 아기였는데. 이제는 잠깐의 포옹도 엄마를 위한 봉사가 되어 버렸다. 아쉬운 마음은 꼭 쥔 채 딸을 풀어주었다. 딸은 그런 엄마 마음도 모르고 총총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떠나는 딸의 뒷모습을 오도카니 바라보며 내 아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을 떠올렸다.


제멋대로에. 툭하면 풍선 터지듯 울며 내가 가진 인내심이란 인내심은 다 끌어다 쓰게 했던-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웠던-도저히 통제할 수 없던 존재였는데. 이제는 키도 엇비슷해져 나와 같은 치수의 옷을 입고 자신의 의견도 꽤 설득력을 실어 말한다. 몸은 성인만큼 다 큰 자식일지라도 엄마라는 종은 그런 자식의 눈에서, 볼에서, 손에서, 엉덩이에서까지 과거의 앙증맞은 조각을 찾아내고야 마는 특징을 가졌다. 몇 번을 찾아도 절대 지지 않고 질리지도 않는 게임이다. 아무도 몰래 고사리손 같은 조각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게임을 즐겼다. 삶의 투쟁에서 일보 물러선 날, 이보다 더 좋은 다음을 위한 준비는 없다.


엄마가 된 후 가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훔쳐보면 한 번씩 젖가슴 안쪽에 전기가 흐른 듯이 자릿해진다. 이 경험은 짧지만, 여운이 오래 남았던 모유 수유 시기를 켜는 스위치가 된다. 임신 10개월이 되었을 때 3개월의 출산 휴가를 신청했다. 뱃속 아기가 나오면 조금이라도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막상 막 달이 다가오자 체중이 확 불었다. 무거운 배를 손으로 받쳐가며 출퇴근을 이어갔다. 나중에는 손목까지 욱신거렸다.


출산 예정일 3주 전, 마지못해 휴직에 들어갔다. 금방 나올 줄 알았던 아이는 출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며칠 기다리다 예정일이 일주일쯤 지난 뒤 유도분만을 했다. 그 결과, 직장에 다시 복귀하기 전까지 아이와 딱 두 달 동안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 짧은 기간이 내가 아기에게 모유를 전달한 유일한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모유가 많이 도는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다시 출근한 다음 날로 바로 끊어졌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기가 아플 때마다 모유를 많이 주지 못해서일까 봐 공연히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았다. 다행히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자라는 아이를 보며 졸이던 마음도 조금씩 아득해졌다.


보이지 않아도 내 영혼은 언제나 아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마치 탯줄 하나로 서로 연결되었던 그때처럼. 바다를 사모하는 육지가 바다를 향해 썰물로 사랑을 표현하듯 늘 아기에게 무엇이든 주는 쪽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바다처럼 깊은 사랑의 물살이 밀물이 되어 내게로 흐르고 있음을 체감한다. 아이의 포옹 한 번에 공허했던 마음이 포근한 기운으로 뭉실뭉실 차오르고, 뽀뽀 한 번에는 햇빛을 받아 강한 초록빛을 발산하는 식물처럼 정신이 맑아진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딸. 우리의 이름다운 순환이 계속 돌기를. 그래서 네가 살면서 눈물이 나도록 힘든 날, 그날에는 내가 가진 모든 다정함을 그 누구보다도 빨리 전할 수 있기를. 아이를 안을 때마다 고통과 미움으로 더러워졌던 마음이 씻겨 나간다.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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