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에이스가 된 비법은?
부서 이동 후 나는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에선지 이전 부서에서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이전 부서에서 했던 착각인 '나 없으면 부서 안 돌아가!'라는 생각이 틀린 것임을 알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해 1년은 아주 바쁘게 보냈다. 보통 아침 7시가 좀 넘은 시간에 출근했고, 저녁 8시나 9시쯤 퇴근했다. 그만큼 설비 셋업업무는 일도 많았고, 나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셋업팀 리더를 잘 만난 덕분일까.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분명 이전보다 더 힘들어진 스케줄임에도 열정을 갖고 업무에 임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리더는 팀 내에서 소위 '일 잘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연차가 얼마 안 된 나도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부서를 옮긴 내게 예전 부서의 선배들은 응원의 메신저를 보내왔는데, 누구 밑에서 일하냐는 질문에 셋업리더 이름을 댔더니 다들 일 잘하는 분 밑에 들어갔으니 많이 배우라고 말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도대체 얼마나 잘하면 사람들에게 '일 잘하는 사람'으로 유명해질 수 있을까?
셋업리더는 J과장이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셋업업무 담당이었지만 부서 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부서장은 그를 찾았다. 본 업무인 셋업은 당연했고, 그는 모르는 업무가 없었다. 자칭 '전문가'인 그는 단순한 자뻑이 아니라 진짜로 다들 인정하는 '전문가'였다. 부서 내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도 자문을 구하려 연락이 엄청나게 왔다. 나는 예전에 내가 꿈꿨던 진짜 '에이스'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같이 업무를 하면서 J과장과 대화를 할 기회가 많았다. 셋업팀끼리 회식도 자주 했었고, 나는 J과장 바로 밑에서 그의 업무를 서포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에이스'의 마음가짐은 어떤지가 항상 궁금했고, 어떻게 하면 '에이스'가 될 수 있을까 궁금했기에 이것저것 물어봤다.
가장 궁금한 것은 '인사고과'였다. 나는 당시까지 소위 '상위고과'를 한 번도 받지 못했는데, 내 생각에 에이스라면 상위고과를 받는 것은 필수였다. 내가 부서를 옮긴 이유 중 하나도 그 부서에서는 내가 상위고과를 받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J과장에게 실례지만 고과가 어떠신지 여쭤보니 대리진급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고과를 안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에이스였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따로 그 비결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상위고과를 쓸어갈 수가 있었느냐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잘하니까 당연히 받는 거지~'.
맞는 말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는 항상 새로운 업무나 새로운 기회가 생기면 도맡아서 해왔고, 그러다 보니 사원 때는 상위고과를 못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능력이 말도 안 되게 상승했어. 너도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서 기회가 되면 여러 가지 일을 해봐야 한다.'
그의 비법은 생각보다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내가 듣기엔 그 예전 서울대 합격생의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는 인터뷰와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나는 J과장과 일하며 그를 관찰해 보기로 했다.
내가 본 J과장은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입버릇처럼 '나는 못하는 일이 없어. 다 전문가야!'라고 말했다. 매사에 자신감 있게 임했고, 실제로 일을 다 해결해 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그는 자신이 가진 정보와 네트워크와 경험을 총동원해서 일을 해결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정리해 뒀다. 또한 그는 회사에 정말 진심이었다. 인성도 정말 좋아서 찾는 후배들도 많았고, 회사 업무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서 가지고 있었고, 일이 끝나면 회사 사람들과 이런저런 자리를 많이 가지며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네트워크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보니 일이 쉽게 해결되는 경우도 매우 많았고, 이는 곧 그의 경쟁력이었다.
나는 그의 옆에서 함께 업무를 하면서 에이스의 조건을 나름대로 3가지로 정리해 봤다.
<에이스의 조건>
1.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것.
2. 업무를 하면서 나만의 방식대로 정리해 둘 것.
3. 회사 내 적을 만들지 말고, 어떤 사람이든 내 편으로 둘 것.
나름 3가지로 정리하니 뭔가 나도 에이스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나도 그 후부터 이 조건에 맞게 일하려고 노력했다. 부서 내에서 나름대로 자리도 잡게 되었고, 이제 상위고과를 받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맡은 업무에서 큰 사고가 났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내가 책임자로 되어있어 책임은 내가 져야 했다. 그 해 절반은 그 사고를 처리하는데 시간을 써야 했다.
그 해 연말 고과면담을 했고, 나는 미안하다는 부서장의 말과 함께 이번에도 상위고과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J과장이 나를 추천해 줬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사고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나는 면담 이후 에이스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J과장은 고과면담이 끝난 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를 위로해 줬다. 그는 이번에 못 받았다고 낙심하지 말고 지금 하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에이스를 포기한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J과장은 몇 달 후 해외주재파견을 떠났다. 그 간 공로를 인정받아 추천을 받아서 떠난 것이었다. 버팀목이었던 J과장도 떠나니 더욱 힘이 빠졌다. 나는 결국 기회를 잡지 못했고, 다시 열정을 잃고 회사를 다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