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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Jan 02. 2024

#10. 일본의 교육

교육 잡설(雜說)

#10. 일본의 교육   

     

    조선이 유학을 국시(國是)로 정하고 과거시험을 중심으로 관리를 등용할 때 일본은 어땠을까요? 조선말에는 당시 선진국이었던 여러 나라의 제도를 도입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일본의 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실시한 일본화 교육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가장 강하게 정착하게 된 분야로 아이러니하게도 교육이 됩니다. 다행히 해방 후 미군정의 개입과 선교사, 유학자들의 교육 참여로 미약하지만 미국식 교육도 자생하게 됩니다. 일본 근대교육의 상징인 국민학교가 1995년이 되어서야 초등학교로 개편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을 보기 위해서 일본의 교육을 보는 것은 반추(反芻)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대의 교육기관은 다양했다. 번(藩)에서 운영하는 번교와 향학, 그리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사숙, 테라코야, 신카쿠샤 등이 있었습니다. 거친 사무라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유학을 받아들였으며 번교는 번사(번의 사무라이)의 교육을 담당하고 유학과 병학(병법)을 가르쳤습니다. 향학은 번의 서민도 가르쳤습니다.     


    다만 번의 재정과 관심에 따라 차이가 심했고 조선처럼 후대로 갈수록 번교보다 오히려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더 번성했습니다. 특히 데라코야(寺子屋)는 지금의 초등학교, 조선의 서당에 해당하는데 일상생활과 관련한 교육을 한 점이 특이합니다. 일본에서는 데라코야를 근대교육의 시작으로 보고 서양의 근대교육보다 일본이 빨랐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막부는 민간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데라코야는 인허가 없이 자유롭게 개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상생활 교육 중 주산과 같은 셈법(산수)을 배웠다는 것은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계약서에 의한 상거래도 활발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교육기관 중 근대일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숙(私塾)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숙은 일반적으로 교사의 사택에 교실을 마련하고 학문과 예능을 제자에게 가르치는 교육 시설이었습니다. 사숙은 본래 사제의 긴밀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특정 유파(사무라이)나 유파의 비법을 은밀하게 전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공개적 성격을 띠며 서학을 교육하고 토론하는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정한론을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 1830~1859)의 쇼카손쥬쿠(松下村塾)가 대표적입니다.      


메이지유신의 산실, 쇼카손쥬쿠


    일본의 교육학자들은 무엇보다 데라코야의 증가에 주목합니다. 2만 개에 달하는 데라코야는 일반 서민들의 교육에 집중합니다. 조선의 서당과 달리 입신양명을 위하거나 유럽의 귀족과 일본의 사무라이 등 특정 계층에 집중된 교육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일본은 유학을 공부해서 사무라이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번의 관리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조선의 과거와 비슷한 제도를 막부 주관으로 시행하지만 하급관리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데라코야의 모습


    그러니 데라코야의 교육내용은 조선과 달리 유학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테라코야에서는 일본어를 교육해서 문맹률이 극도로 낮추는 계기가 됩니다. 이미 메이지유신 전에 이미 근대 교육체계가 개편이 시작되고 있었다고 자평하는 이유입니다. 근대화는 지식인의 뛰어남과 많고 적음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계몽하는데 다름이 있었습니다. 일반 지식의 공유와 교류는 지식혁명을 이루어냈습니다. 인간의 지적 호기심은 명예, 권력, 부의 욕구를 향해서 분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을 수 없는 다수는 이러한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없었고 조선은 1910년까지 한글 교육을 공식화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에도막부 시기에 조선과 달리 완전한 쇄국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일본도 기독교의 유입을 막고 내부 안정을 위해 쇄국을 하지만 이미 조총을 수입하며 서양의 과학을 접한 일본은 상공업에 한해서 일부 교류를 허용했습니다. 에도막부는 1641년 히라도(平戸市)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을 데지마로 이전하게 했습니다. 데지마(出島)란 1636년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입니다.


데지마

      

    1941년에서 1859년 사이 네덜란드와의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만 독점적으로 허용했습니다. 쇄국시기에도 일본이 서양과 교류할 수 있었던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네덜란드 상관은 무역에만 종사하였고 기독교 포교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에도막부는 네덜란드 상관(처음에는 포르투갈) 과만 무역하였고, 다른 서양 국가의 배들은 일본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이 정기적으로 왕래하였습니다. 데지마의 주요 수입품은 설탕, 직물, 향신료, 장식품 등이었고, 수출품은 은, 구리, 도자기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역을 통해 에도막부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서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였고, 무역의 양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청나라와 조선의 학문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 시기 일본에 전해진 네덜란드의 지식체계를 난학(蘭學)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란가쿠(蘭學) 시기라고도 합니다.    

 

     난학은 네덜란드 및 유럽의 지식체계가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성립한 학문입니다. 에도막부 시기 난학의 보급은 세 가지 분야에서 발전합니다. 첫째는 네덜란드어 통역관들에 의해 어학이 보급되고 난학서가 번역된 시기입니다. 네덜란드어가 중간언어가 되어 영어, 프랑스어 등도 알려집니다. 통역사는 모든 행사에 네덜란드인과 동행하였으며, 점차 난학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현대에도 엄청난 양의 번역을 합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도 대부분 일본이 번역한 책을 재번역해서 출판했습니다. 당연히 번역을 위해서는 새로운 단어와 개념의 매칭이 필요했고 기존 사상에 대한 재해석과 융합이 활발히 일어나게 됩니다. 막부 차원에서 정치, 종교와는 분리시켰으니, 교조적으로 흐를 이유도 없었고 배움에 장애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데지마에는 네덜란드인을 통해 서양의 의학, 수학, 천문학, 군사학 등의 최신 과학 지식을 소개하는 서적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통역사는 서양 학문을 습득해 일본인에게 가르치고 중요 서적을 번역했습니다. 점차 일본 젊은이는 신지식을 배우기 위해 나가사키로 유학을 왔으며, 이들은 초기에 어학을 배우고 점차 자신의 관심 분야로 연구를 확대하면서 난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했습니다.     


    둘째는 실생활에 난학이 접목되었습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인 치료를 위해 네덜란드인 의사가 거주했고, 어떤 경우에는 일본인 앞에서 직접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 줬습니다. 특히 외과술은 일본인들에게는 혁신적인 치료법이었습니다. 당연히 난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난학자들이 등장했습니다. 1823년에는 독일 출신 의사가 나가사키 근교에 나루타키(鳴瀧) 학원을 세워 의학과 과학기술을 가르쳤습니다. 막부 말기에는 일본 전체 난학자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셋째, 난학자들은 최종적으로 군사 분야를 발전시킵니다. 막부 말기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은 위기의식을 높였습니다. 개항 초기 막부는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식 포술을 배워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1855~1859년 네덜란드 해군 교관을 초빙해 서양식 해군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이후에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당시 선진국 거의 모든 나라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군사교육을 받습니다.


   일본은 청이나 조선보다 근대교육을 위한 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동아시아가 모두 철저한 쇄국 정책을 할 때 데지마를 만들어 상공업을 유통한 것은 매우 시기적절했습니다. 참든교대(参勤交代)와 더불어 일본의 상공업과 도시 발전, 신 계층의 등장 등 근대화를 위한 기본 에너지가 충전되고 있었습니다.      


    일본도 조선의 보빙사처럼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 1871~ 1873)이 17개국을 다닙니다. 일본은 막부시기에도 3번에 걸쳐 미국과 유럽에 사절단을 보냅니다. 러시아의 역사가 유럽의 편입되는 시점에 유럽을 배우고자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에 보낸 대사절단을 모방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절단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등도 사절단에 포함됩니다. 그들은 전 세계를 다니며 자신들이 모델로 삼아야 하는 국가를 분석하고 신생 일본국에 적용합니다. 그들은 사절단만 48명이었고 유학생이 60명이었으며 전 세계에서 선진 문물을 배웠고 유학생은 그 나라에 남아 유학한 후 돌아와 일본 정부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메이지 정부의 핵심인물이 되었으며 비판과 갈등이 있었지만 모두 죽지는 않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은 처음 도착한 미국에서 철도 시스템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일본 철도 산업을 발전시키고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에 활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의 의회제도를 살펴보고, 공화정보다 유럽식 입헌군주제 식의 정치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특히, 미국에 남아 하버드 대학의 법학을 전공한 유학생 가네코 겐타로(金子 子堅, 1853~1942)는 귀국해서 메이지 헌법을 만들었으며 러일전쟁 등과 관련해서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는 미일 동맹을 주장한 최초의 일본인이며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공장 설비, 노동자 처우 등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의 변신을 배우고, 사절단은 상공업과 무역을 중요시하면서, 상업과 무역은 평화로운 전쟁이라고 평했습니다. 특히 입헌군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유럽대륙과의 역사와 대영 제국이 되는 과정, 해군력을 통한 군사력 확장을 의미 있게 본 것으로 보입니다. 해군은 초기의 논란에서 벗어나 이후에는 영국 해군의 군함과 전술을 메이지 해군에 적용합니다.     


    독일(당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를 만나서 독일이 경험한 “만국공법의 문제에 있어 강대국 중심의 만국공법의 문제를 극복하려면 소국을 벗어나야 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독일을 통해 자주권, 부국강병의 성공 사례를 발견한다.”라고 하며 향후 일본의 군사력 팽창의 길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이후 독일 통일 과정과 군사력 확장과정을 답습하고 독일 육군 장교를 초빙해 메이지 군대의 군사개혁을 단행합니다.     


    특히 사절단의 목적과 유학생을 동행한 이유가 모두 교육을 통해서 혁신적이고 동시적인 개혁을 추구해서인지 서양 교육 제도에 대해서도 깊은 조사를 했습니다. 당연히 근대의 철학 사조와 근대교육 개념을 보고 학문연구의 필요성과 국민 교육의 시급성을 이해했습니다. 또한 도덕성, 서양 기독교 교육의 바탕을 일본과 차이로 인식하고, 실용적인 공교육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국가 교육의 틀을 잡습니다.       

  

    근대 국가에서 교육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근대 국가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국민을 서로 하나 될 수 있도록 엮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도 막부를 쓰러뜨리고 수백 개의 번에서 나눠 살며 다양한 풍습을 가진 백성들을 스스로 일본 국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일본은 1872년에 학제가 발포되어 6세 이상의 국민들은 소학교를 의무교육으로 하고 수신·일본사·지리 등의 과목을 배우며 일본이라는 국가 개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8개의 학군으로 나누어 소학교·중학교·대학교·사범대학교를 설치했습니다. 학교 설립은 강제적이고 재원이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의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지금 생각과 달리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1890년의 교육칙어(敎育에關한勅語)는 천황이 자신의 신민들에게 충성·수신·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훈시의 내용을 담아 내린 칙어로 학생들은 천황의 초상을 담은 어진영(御真影)과 함께 소중히 대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육칙어는 천황제 국가를 수립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02년 일본의 한 소학교(초등학교)에서 교육칙어를 봉독 하는 모습.


    일본도 메이지 초기에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고 많은 세금 때문에 큰 반발이 있었지만, 교육이 고위 공무원이나 장교로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자 국민들도 근대교육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천황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의 강조와 제국주의에 대한 책임을 고려해서 맥아더의 연합국 최고사령부(SCAP, GHQ)에서 교육령과 교육칙어를 폐지하면서 종식되고 일본의 현대 교육은 유사하지만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일본 제국의 교육체계는 식민지 조선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지만 2~3등 국민임을 고려해서 교육 내용은 많이 달랐습니다. 일본 근대교육의 핵심은 교육칙어에 단적으로 담겨있습니다. 제국주의로의 열망을 교육칙어로 이해한 미군정도 전후 교육칙어 관련 행사를 금지시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금지되었습니다. 특히 1911년의 조선교육령에는 한국인을 차별 교육하겠다는 의지를 제3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는 말은 일본과 다른 교육을 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5.16 후 군사정권은 논리적 구성이 매우 유사한 국민교육헌장을 1968년 11월 26일 국회 만장일치로 발표합니다. 1994년 사실상 폐지될 때까지 국가와 교육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어떻게 보면 뒤늦게 근대 국가를 자주적으로 추진했다는 정도의 의의가 있겠습니다. 어차피 일본의 교육칙어도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방향타 역할을 했고 군사정권의 수뇌부가 일본 근대교육의 핵심이었던 군사교육을 받았으니 배운 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일본의 교육칙어와 대한민국의 국민교육헌장


     당시 우리나라가 빠르게 성장하는데 전 국민의 교육열이 영향을 줬으니 어떤 의미로는 맡은 바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근대교육을 빠르게 받아들였을까요? 일본이 조선과 달리 근대교육의 기반을 유신 전에 이미 닦았다는 것은 과장입니다. 유신 전에 일본도 조선의 실학자나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근대 국가로의 변신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유신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근대화에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아시아의 근대화의 모델이 되는 서구의 근대교육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현대의 우리는 일본이 우연히 너무나 근대교육을 하고 싶어서 메이지유신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빠른 성장(?)과 변화의 배경에는 근대교육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조선은 근대교육을 받아들이기에 성리학의 성체가 너무나 크고 높았습니다. 그런데 근대교육을 시작했던 서구도 처음 시작은 어렵지 않았을까요? 어떤 이유로 그 공고했던 체제가 변화했을까요? 우리는 이 여정의 끝에서 현대 교육의 방향성을 어렴풋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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