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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Dec 31. 2023

#9. 조선의 교육

교육 잡설(雜說)

#9. 조선의 교육          


    조선은 왕조를 새로 세웠지만 넓은 의미의 교육제도개혁은 없었습니다. 기존의 유학적 가치관들이 방향만 전환되고 교육과목이 다소 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왕조를 열었고 초기 중앙정부에 참여하지 못한 지방에도 많은 유학 교육기관이 설치됩니다. 지금의 공립학교 개념을 관학(官學)이 담당하고 사립학교 개념을 사학(私學)이 담당합니다. 


    관학은 한양에 설치된 4학(四學, 동서남북) 이, 사학은 서당이 초등교육을 담당했습니다. 고려 때와 달라진 것은 귀족과 관료 자제만 가능했던 교육이 양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서당도 고려 때의 경당이 개편된 것인데 당연히 고려보다 그 수가 많았습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향교와 지방 사림이 제사와 교육을 담당합니다. 고등교육 기관은 성균관(成均館)이 있었으며 왕가(王家)는 시강원(侍講院)을 설치해서 개인 과외를 시켰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 교육의 세부적인 역사보다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의 교육과 유학이 구한 말처럼 문제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조선 멸망을 로마의 멸망만큼이나 여러 각도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로마 역사가들도 로마의 멸망 시기와 원인에 대해 다양한 이견이 존재합니다. 당연히 조선도 멸망의 즈음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로마제국도 로마 건국기였던 5 현제 시절 정도가 전성기였습니다. 일본과 중국도 망하는 시기의 모습은 너무도 처참합니다. 이미 기울기 시작한 국가는 꺼져가는 생명처럼 다시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조선도 초기의 역동적인 문화는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조선은 고려 공민왕의 개혁 정책 실패를 딛고 개국했습니다. 어떤 유학자는 개국공신이 되고, 반대했던 많은 이들이 죽거나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유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만해도 유학을 바라보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했습니다. 조선을 흔히들 맹자의 나라라고 하는데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정도전이 맹자를 대의명분으로 삼았으며 주자가 유학 경전에 포함한 맹자를 초기에는 신봉합니다.

      

    조선은 주자 성리학을 신봉했고 주자가 역경(周易)과 맹자(子)를 중요한 경전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조선의 유학자들도 공부했던 것입니다. 당시 주자 성리학은 유학을 철학의 수준으로 올렸기 때문에 불교와 도교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철학이었고 선진 문물이었습니다. 다행히 중국도 한족의 나라인 명을 개국하고 유학이 근본이 되니 매우 시기적절했습니다.      


    또한 굳이 사대를 말하지 않더라도 현대 외교 공영어가 영어인 것처럼 최소한 동아시아에서 한자는 외교에서 필수 불가결한 언어였습니다. 특히 중국의 조공외교는 사신을 통한 내정 간섭이었고 외교로 조공의 종류와 양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정치 행위였습니다. 다만 말이 통하지 않는 보통의 관리들은 통역 또는 필담(筆談)으로 대화했습니다.      


    조선 천재 중 한 명이었던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중국 관리 등과 밤새도록 필담을 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선의 관리가 통역 없이 사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국익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신숙주(舟, 1417~1475)는 언어 천재였습니다.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방문하기도 하고 조선에서 명의 사신단을 응대하는 중요한 직책을 수차례 수행합니다. 그는 당연히 직접 대화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왕조는 주변국을 오랑캐로 치부하고 비문명국으로 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명과의 외교를 통해 얻을 건 얻고 잃을 건 조금 줄여야 했습니다. 당시 경제력은 조공에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다른 나라의 힘을 상쇄하기 위해서 조공량을 늘리거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조공을 줄입니다. 당연히 조선 관료들이 명나라 관리들의 화법으로 쓰고 말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기준으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천재는 너무나 소수이며 시대와 신분의 모집단에서 임의대로 나옵니다.      


    당연하게도 인재는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교육하고 양성하게 됩니다. 고려와 다른 점은 기술 분야는 중인에서 선발하고 승려를 제한하기 위해 승과도 설치합니다. 고려처럼 무과도 설치하지만 시험 과목에 일부 유학과 병법을 포함하는 차이를 두었습니다. 고려 무신들이 전투에는 능하지만 글을 모르거나 신분이 낮은 자가 등용되는 등의 폐단(?)이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문과나 무과를 통과하고 관리로 임명된 자를 양반이라 불렀습니다.      


    조선은 앞서 이야기한 통역 문제로 중인들에게 역관(譯官)을 직업으로 할 수 있도록 잡과 중 하나를 설치합니다. 역관은 삼국시대부터였다고 하니 오래된 전문직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조선의 역관에 주목하는 이유는 양성과정이 체계화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개국공신들은 조선의 초기 기틀을 빨리 잡고 안정화시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고려의 여러 정치제도를 유사하게 계승 발전시킵니다. 고려 때에 통문관과 사역원을 두었던 것처럼, 조선에서는 사역원과 승문원을 두어 외국어를 학습합니다. 과목은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을 위해 한학, 몽학, 왜학, 여진학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나라의 언어를 교육했습니다. 물론 역과는 대다수를 한학 전공자들에서 선발하고 기타 언어는 2~3명 정도를 매년 선발했습니다.      


    역관들은 별도의 급여가 없는 관계로 사신단으로 참여할 때 중개무역을 허락합니다. 일종의 무역상으로 많은 부(富)를 축척하게 됩니다. 역관으로 유명한 가문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선진 문물을 접한 경험과 경제력으로 조선 후기에는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역관 교육을 위해서 여러 교과서가 만들기도 하며 이들을 가르치는 사역원(司譯院)은 지금의 국립외교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시키며, 수료하면 여과를 시험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교육양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경쟁이 치열해서, 최소한 교과서를 완전히 외워서 다시 쓸 수 있어야 합격이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교과서 내용입니다. 중국어 교재로 유명한 것이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事)인데 노걸대는 세 명의 고려 상인이 중국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중국어 학습을 꾀한 책으로 노걸대는 비즈니스책이고 박통사는 중국 사람의 생활풍습과 제도를 소개한 책으로 일상회화 내용이라고 합니다.    

  

    구한말에 영어 교육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고종은 1886년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院)을 세우고 영어 교육을 시행합니다. 해방 후 아직 대한민국 건국 전 군대가 없던 시절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설치한 것과 유사합니다. 육영공원이 설립된 직접적인 계기는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約)이 있었습니다.   

   

    청의 강력한 권고와 일본과 러시아의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다만 청의 요구로 조약이 체결되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문구가 만들어집니다. 1943년 이승만은 미국에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며 이 조약을 미국이 지키지 않아 일본이 조선을 침탈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고종은 이 조약을 근거로 최초의 외국 공사관을 설치하고 미국은 답례로 민영익을 필두로 하는 1883년 보빙사(報聘使)를 초청합니다.      

1893년 시카고박람회에 참석한 보빙사 일행

    그들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각지를 여행한 후에 귀국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육영공원이 세워지고 헐버트( 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등이 파견됩니다. 이들은 본래 유니언 신학교의 학생이었며 일종의 선교사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근대식 공립학교는 이렇듯이 신학과 어학을 동시에 교육하게 됩니다.  

   

    유학 교육은 조선의 관료들에게는 선진 문물이었고 철학이었으며 국가 이념이었습니다. 당연히 체계적인 교육이 존재했고 한편으로 유학의 이념인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서 별도의 교육이 존재했습니다. 다만 유학의 특성상 등용하지 못한 지식은 사문화되었습니다. 조선 후대의 북학, 서학, 실학은 이런 배경 속에서 주류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활발한 활동도 국가 차원에서 조직화, 집중화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갖기 어렵습니다.      

    개혁군조였던 정조대왕(祖, 1752~1800)조차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공식화합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기에 조선은 너무 노회(老獪)했습니다. 기존의 교육체계나 내용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2,000년 전의 플라톤의 국가론과 공자의 논어를 공부합니다. 어떤 사상, 철학, 이론 등의 내용이나 체계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교조적인 믿음이 문제를 야기합니다. 동양보다 모든 면에서 별로 대단하지 않았던 유럽이 근세부터 동양과 달라지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경험과 기억으로 대표되는 과거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조선은 너무도 장기간 쌓아 올린 성리학적 체계가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리학은 만병통치약이었고 캐도 캐도 끝이 없이 나오는 선물 보따리였습니다. 모든 생각과 사고의 바탕에는 성리학적 판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체계, 방법, 실천 도리, 도덕, 관계, 삶과 죽음, 토지, 돈, 정치, 형벌, 천문, 지리, 역학 등 얽히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험한 성리학적 생태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충과 불효였고 반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상식이었고 아마 현대 대한민국의 어른들을 그 시대로 그대로 옮겨도 비슷할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조선의 교육체계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인재 등용 측면에서도 매우 형평적이었고 공정했습니다. 오히려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조선은 만성적으로 공무원 부족난에 시달립니다. 한 명의 관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녹봉은 적었습니다. 정말 어떤 역사에서도 보기 힘든 완전히 이상적인 국가였습니다.     


    외부의 침략과 간섭이 적었던 조선 초기에는 명, 일본과 중립외교를 실시하고 몽고, 여진 등과는 등거리 외교로 국내 정치를 안정화했습니다. 특히 북방 민족은 명나라 초기 극심한 혼란과 명의 군사력 강화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역사상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화 시기였습니다. 조선은 그 기회를 잡아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훌륭한 왕과 관료들이 조선 전기에 집중된 이유입니다. 당연히 교육체계도 잘 돌아가고 훌륭한 인재들이 계속적으로 유입됩니다. 왕의 경연장에서는 성리학과 부국강병을 위한 다양하고 자유로운 논의가 펼쳐집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감당하기에 세상은 매우 복잡하고 빠르게 변해갑니다.      


    이이(珥, 1536~1584)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다양한 혁신안(變法更張, 時務六條)을 선조(祖, 1552~1608)에게 건의합니다.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이는 혁신안에서 서얼에게 과거시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천민도 무관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가진 건 사람밖에 없는 나라에서 인재를 차별하는 것은 스스로를 버리는 행사였습니다. 이이는 죽기 직전까지 당색과 관계없는 인재 등용을 부탁하며 붕당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사후 서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붕당의 대표적 인물이 됐으니, 그것도 아이러니합니다.      


    이렇게 개혁의 순간을 놓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황폐화되었습니다. 군사려, 경제력 등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관념체계가 무너졌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조정, 자신들만을 위하는 양반, 전장으로 밀려나는 양인 등 성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음에도 오히려 동양 삼국이 모두 쇄국 정치를 하며 내부로 눈을 돌렸습니다. 특히 조선은 청, 일본과 달리 외세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되면서 지도층과 지식인들이 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애써 외면하며 오히려 교조적으로 매몰됩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한몫합니다. 근본적으로 조선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상공업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려 합니다. 또한 성리학적 가치로 사치와 음주를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영·정조 시대 조선의 발전은 눈부셨지만 같은 시기 청과 일본의 경제 발전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습니다. 소중화(小中華)를 꿈꿨던 조선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이미지는 이 시기에 만들어집니다.   

   

    어떤 역사든지 지속적인 변화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변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 전과 구분하기 위해서 개혁, 혁신,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왕조나 정치체제의 급격한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교육의 일방적인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정치사상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도태당합니다.      


    조금씩 변화하고 조금씩 다가가서 서서히 변해야 합니다. 무조건 변해야 합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실천의 문제입니다. 현재 교육이 바로 다음의 미래를 만듭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당연히 미래는 지금이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좋은 교육 제도와 선각자가 나타나 봤자 이미 늦습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유사한 시기에 다른 국가에서는 어떤 교육을 했기에 우리와 다른 길을 걸었을까요?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개념으로 자유와 계몽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개념은 근대 국가라는 시스템을 빠르게 발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자유와 계몽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가지고 국가라는 개념과 국민이라는 의미를 진보시키고 전파합니다.      


    결국 근대화란 이런 근대적 개념의 정착 과정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철학, 과학, 경제 등도 주요 개념이지만 여기에서는 교육이라는 관점에서만 살펴보겠습니다. 조선도 근대화의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지엽적이었고 수동적이었으며 노력의 결집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 중에서 계몽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단순히 시기의 문제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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