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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Dec 20. 2023

#7. 이이와 정약용의 교육

교육 잡설(雜說)

#7. 이이와 정약용의 교육


   이이(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관료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이이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겁니다. 이이의 본가는 파주지만 어머니 신사임당(師任堂申氏, 1504~1551)의 본가가 강릉이었고 관례에 따라 그곳에서 태어나 6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강릉에서 더 유명합니다. 호인 율곡은 밤골이라는 뜻으로 파주 율곡리의 지명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는 하급관리였고 데릴사위였습니다. 심지어 신사임당 사후에 첩이 자녀들을 괴롭혔다는 기록을 보면 유년시절은 본가보다는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이이는 천재였고 어머니의 교육은 철저했습니다. 가문을 세우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이는 유아 시절을 제외하고는 당대의 스승들 문하에서 공부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고 잠시 불교에 심취했던 일화도 유명합니다. 다만 평생을 두고 당시는 공부의 목적이었으며 승려는 아니었다고 반성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에 당시의 불교 공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게 현대의 중론입니다. 물론 이이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과거에서 장원만 9번을 한 구도장원공일 겁니다. 지금 어머니들에게는 이이의 사상보다 구도장원공이 더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물론 이이도 낙방한 사실도 있고 불필요한 시험을 봐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도로는 관직에 빨리 임명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시험이었고 단지(?) 수석을 한 것뿐이었습니다. 여하튼 이런 사람이 조선 500년을 통틀어 이이 한 명뿐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이는 일생동안 정말 공부를 많이 합니다. 많이 공부하고 어떤 집단에서 수석을 하는 사람은 나름의 비법이 있습니다. 이이의 공부 비법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한번 집어보겠습니다.


이이의 표준 영정


1. 입지 공부법: 뜻을 세워라.

2. 교기질 공부법: 공부하는 습관을 가진다.

3. 혁구습 공부법: 잘못된 옛 습관을 버려라.

4. 구용구사 공부법: 바른 몸가짐과 바른 생각

5. 금성옥진 공부법: 처음과 끝을 일관성 있게

6. 일목십행: 독서를 습관해 해라.

7. 택우문답 공부법: 좋은 벗과 함께 공부해라.

8. 경계초월 공부법: 고정관념과 경계를 넘다

9. 지어지선 공부법: 선한 마음으로 공부해라.     


   보셔서 아시겠지만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수석들의 입장은 불변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선비들의 공부는 지금보다 치열했습니다. 모든 책이 중국의 언어와 역사와 예법을 담고 있고 다른 나라말로 논리와 시를 작문해야 하니 그 고충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사서삼경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외워야 했으며 작문할 때 적절하게 인용하고 삽입해서 논리를 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관료는 이런 기본서를 토대로 정치, 외교, 의례,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일을 할 정도로 만능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서도 수석이라니 대단합니다. 최종 수석은 그의 나이 29세였습니다. 이이의 자녀는 특별한 성취가 없었고 그러니 교육 방법도 특이할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사임당의 교육 방법이 오히려 많이 알려졌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녀 각자의 재능을 고려하고 엄격하게 교육했다고 합니다. 엄격한 교육이란 말이 애매하기도 하고 그 시대에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도 자기 자식은 귀했습니다. 자식에게 엄격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석봉의 어머니와 더불어 자녀 교육에 성공한 한 분으로 회자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알려진 맹자의 어머니를 본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의미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본인의 천재성 그리고 관료로서 경험, 유배의 고통 등을 자녀들에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유배지에서 자녀들에게 편지로 이러한 생각을 전합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남은 생애를 자녀들과 함께 저술 활동을 하며 보냅니다. 정약용의 자녀들은 유배로 폐족을 자처했고 18년 유배가 끝난 이후에는 이미 관직에 등용되기는 늦었습니다. 다만 손자 때부터 다시 관직에 올랐습니다. 자녀들이 특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규양지에서 자녀에게 보낸 편지가 너무도 세세해서 오히려 마음이 짠해집니다.     


   정약용은 아마 자식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유학의 근본인 경세치민(經世治民) 하기 위해 공부하는 방법부터 집안의 경제를 유지하는 법까지 세세하게 당부합니다. 기존의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질적인 학문을 원했던 정약용은 자식들도 임금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도 시대를 역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몰렸고 형제들과 가문이 천주학을 접했다는 이유로 몰락했으니 기존의 주자 성리학적인 체계를 모든 분야에서 조목조목 비판하면서도 요즘말로 강력한 한 방이 부족해 보입니다. 

다산 정약용 


    저서가 500권을 넘는다고 하니 너무도 방대해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혼란스럽습니다. 다만 당시의 실학자로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해 과거의 수많은 책을 읽고 정리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책을 비교 분석해서 새로운 책을 만들기도 합니다. 자주적 사상을 중요하게 여겨 조선의 현실에 맞는 여러 제도나 정책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는 조선의 교육제도에 대해 강한 비판과 새로운 개념을 내세웁니다. 주자 성리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사람은 언제나 교육 등의 환경(경험)으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백성들도 변할 수 있듯이 조선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약용의 교육 사상 중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정약용은 교육 기회의 균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공부와 과거 시험의 이중성과 과거를 통한 인재선발과 신분제로 인한 인재의 불균형한 등용으로 인해 악순환에 빠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민화 정책을 폈던 왕조들은 반드시 몰락한다며 백성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위정자들과 일반 백성은 배움의 내용에 차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한계가 분명하지만 당시 상황을 전제하면 대단히 혁명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둘째, 북학파의 기술 실용주의에 토대를 둔 기술 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근대화 선진국들이 과학 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한 것과 일제강점기의 교육자들이 과학 교육을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 스스로 과학적 호기심으로 학문을 대했으니 어쩌면 모든 것에 우선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관료들의 전인 교육을 중시했습니다. 관념론에 파묻힌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권력욕이 조선을 병들게 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문제점을 교육 체계의 실패로 보고 교육 체계와 과거 제도의 폐단을 비판하며 현실적인 개선책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근대 국가 교육의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구상한 학교 체제의 개편은 예비 관료인 선사(選士)의 선발과 양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선사는 공론에 의한 천거제를 통해 선발하고 전인적 인간으로 양성된 선사 중에서 다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가지는 거자(擧子)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또한 학교 체제와 교육 내용 및 평가, 과시 체제나 과거 과목 등에 대해서도 전반적인 개선안을 구상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이 구상한 교육제도 개혁의 목적은 학교 교육과 과거 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계해서 도덕적 자질과 실용적 전문 행정 능력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양성하고 이들을 관료 체계에 등용해서 궁극적으로 국가 개혁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당시에는 당연시 여기던 숙명론의 허구를 밝히고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교육 사상을 설파한 그는 어쩌면 조선의 계몽주의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산이 교육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왜 그토록 다작을 저술했는지를 알 수 있는 함축적인 문장이 있습니다.     


“백성을 통치하는 자의 정책은 백성을 가르치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교육을 위한 것이며 더 이상 교육할 것이 없으면 정치를 잘 못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정치와 교육을 동일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다산은 본래는 자신이 형인 정약전 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는 정조대왕도 인정한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살아남아 더 많은 공부를 했고 그런 부채로 후대에 어마어마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정조 대왕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그리고 이후 100년의 기간 동안 조선은 정약용의 개혁안을 일부라도 받아들였을까요?      


    교육제도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조선의 주자 성리학 체계는 한두 사람의 학자나 사상가에 의해서 변할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습니다. 정조대왕의 사후 조선은 몇몇 가문과 당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문을 걸어 잠급니다.   


   견제 장치 없는 권력구조와 정치보복의 악순환, 각종 정치 사회적 부조리와 민란의 도미노 현상, 거듭되는 기근과 질병, 대외관계에서의 실패 등…… 세도정치기에 등장한 이런 현상들은 특히 그 직전의 정조 시대와 너무 대조적이어서 같은 시대의 조선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역사의 정반합 논리는 어느 시대나 나타날 수 있으며 1800년대 이후의 시대적 혼란은 이전의 비합리성이나 해결되지 않고 묻어왔던 불합리가 분출된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혼란스러웠지만 아마도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국가가 외부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언제나 연민을 자아내게 합니다. 특히 수많은 사람이 조선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에 뛰어들지만 그 누구도 현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총체적 난국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대의 많은 연구가들이 조선의 경제, 정치, 군사 등의 문제점을 연구했으니 저는 간략하게 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혼란기에는 당연히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다만 조선의 유교는 생각보다 공고했습니다. 특히 충과 효, 나아가 의리의 관념체계는 생각보다 더욱 질기고 오래갔습니다. 여기에 신분체계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자주적이고 실학적인 교육을 주장했던 정약용 조차도 한글로 된 책 한 권을 저술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벽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복수와 탄핵으로 점철된 언론과 문화는 오히려 공론화를 어렵게 하고 사회를 움츠려 들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전대인 영정조 시절이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습니다. 특히 천주교에 대한 지독하고도 처절한 박해는 근대의 모든 사상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조선에서 주자 성리학은 유교로서 일종의 종교적 역할도 병행했습니다. 제사를 주관하고 교리가 있었으며 서원 같은 기구가 있었으니 종교와 다른 점을 찾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유럽이 근대화되기 전까지 학교는 종교교육을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중세를 거치며 수도원 등이 읽고 쓰고 말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대학들은 수사학, 철학, 역사 등을 가르치고 일부 수도원은           


    노력의 결집이 부족했습니다. 각자는 매우 훌륭하고 업적도 있지만 국가는 유교 이상 국가였습니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윤리처럼 개인의 노력으로 체제가 변화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파급효과가 낮았고 아무리 좋은 논리도 어느 날 갑자기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몰아가면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오히려 퇴보됩니다. 실학자가 아무리 떠들어도 국가체계가 변하지 않는 이상 한계가 발생합니다. 폭발적인 지식의 확장은 고사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비해 인쇄술이 발달하기 어려웠고 한자의 특성으로 출판업과 도서관, 서점 같은 지식 유통, 지원 시스템도 부족했습니다.       


    조선의 대외 경제는 대부분 중계무역이었습니다. 인삼과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수출할 만큼 고품질의 생산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조선 후기로 가면 일본이 인삼과 도자기를 자체 생산하고 수출하며 공무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한편으로 조선의 성리학은 청빈을 중요시하고 상공업을 천대했기에 순수하게 부를 축적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신분제로 전쟁이든, 상공업으로 부자가 되는 신흥 계층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유럽과 일본 근대화의 중심이었던 직업적으로 상인, 의사, 수공업자 등도 부족하니 조직화도 어려웠습니다.      


    겨우 만들어진 것이 보부상(褓負商) 정도였습니다. 조선의 개화 시기 보부상들의 활약이 눈에 띕니다. 화약도 모여야 폭발력이 커집니다. 적은 양으로도 불은 잘 붙지만 시간이 흐르면 쉽게 꺼집니다. 특히 근대화, 실용, 자주 등이 자신들에게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한 사상일 수 있으니 대놓고 가르치지 않고 숨어서 가르치고 서로 교환합니다. 이것도 잘못하면 서학쟁이로 몰려서 패가망신하거나 외래신이 들었다고 미친놈 취급합니다. 돈을 벌어야 자식을 교육하고 관직에 등용돼야 권력을 잡든 학자가 되든 할 텐데 돈도 없고 돈이 되지도 않는 교육을 하기에는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기후 변화 등으로 대흉작과 대기근이 반복되고 모든 토지가 양반의 소유가 되며 결정론적 세계관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인데 공부는 뭐 하려 하겠습니까? 괜스레 공부 좀 한다고 잘난척하다 천주쟁이, 동학도, 되놈이나 왜놈들 앞잡이로 몰려 죽거나 귀양 가느니 그냥 조용히 사는 게 장땡인 세상이 됩니다. 어쨌든 모난 돌은 정 맞고 웃자란 나무가 먼저 베어집니다. 그렇지만 송곳도 주머니에 넣어야 비어져 나옵니다.     


    그런데 결국 송곳은 기독교였습니다.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선교사를 통한 종교의 끊임없는 유입은 조선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 엄청난 돌을 던졌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남녀노소 신분의 높낮이가 없다는 평등사상과 성경의 한글화가 크게 기여합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이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촉발된 것과도 유사합니다.      


    유교와 불교 도교의 대안으로서의 기독교적인 유교 그리고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종교 집회 성경 공부 자체가 근대를 평등과 자유 모세의 출애굽기는 영감을 주었을 겁니다. 마치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핍박답던 그리스도인처럼 조선의 기독교는 단단해져 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만 전파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백성들을 긍휼 하게 여겨서 그들의 선진 문물, 즉 정치, 경제, 그리고 과학기술을 일정 부분 전달합니다. 

     

    모든 문명은 그렇게 전해졌습니다. 중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동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갈 때처럼 다시 유럽에서 아시아로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자신의 문명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의 유입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식 세계에서 더 좋고 진화한 문명은 전이됩니다. 물이 차면 넘치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上善若水).  문화가 이행하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유럽 기독교 문명이 동양의 유교 문화보다 우위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의 신지식인들이 왜 그토록 기독교에 열광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 호기심을 느낀 지식인 중 일부는 우리도 모세나 예수처럼 개혁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몽상이 좀 더 체계적이고 백성들이 좀 더 교육이 되어서 보편적인 사상이 되었다면 갑신정변은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일본도 조선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의 논리도 문명 우위론이었으니 조선이 서양 문물을 조금만 빨리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뒤늦게 지지하는 세력 없이 추진한 갑신정변(甲申政變, 1984)의 추진동력 중 하나는 일본의 차관(credit, 借款) 약속이었습니다.      


    차관(돈)이 없으면 개혁을 단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면서도 지지 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행한 것은 조선 반정(反正)의 역사에서 배운 학습효과(세력이 없어도 왕만 잡으면 된다)였는지도 모릅니다. 1884년 당시의 조선에서 정변을 하자고 돈을 융통해 달라고 하면 누가 순순히 했겠습니까?      


    시간이 부족했던 개화파는 일본처럼 존왕하고 민중의 분노를 기존의 정치세력에게 전가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력까지 갖춘 강력한 번(조슈, 사쓰마)의 정치 구도가 젊은 개화파로 교체되었고 심지어 이들이 연합하며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개화파는 힘과 돈이 없는 개혁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이상주의자들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설득하고, 신흥 지식이면서 불만 세력이었던 중인, 상공업자, 동학 등과 연대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때부터 원래도 이미 기울고 있던 고종과 명성왕후는 완전히 삐뚤어집니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반목 등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한 김옥균과 그의 가족들을 참혹하게 말살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혼란한 시기에 자신의 권위와 권한이 줄어드는 것을 막으려고 백성을 탄압하고 전제군주제로 퇴행해 버립니다. 갑오경장과 대한제국 선포는 이미 침몰하는 배에 구멍을 막는 수순이었습니다.      


    겨우 서구문명과 주변 정세에 밝았던 개화파의 몰락은 기존 성리학 체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미 당시 지식인은 조선의 정통적 성리학 교육체계에서 등용된 관리가 아니라 오히려 청나라와 일본의 유학생이었습니다. 국가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은 결국 고종의 명만 받들고 양반 관료들의 눈치만 보는 머리 좋은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실천가가 나오지 못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을 국가 차원에서 활용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얼마 있지도 않은 아까운 혈세만 낭비하게 됩니다.      


    이 갑신정변의 주모자 중에서도 서재필은 독특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해방 후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도 그렇고 당시에 보기 드물게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과학은 의학의 발전과 매우 밀접했습니다. 현대의학은 현대 과학 발전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연희전문대도 선교사가 세웠으며 의대도 이즈음에 설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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