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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Dec 25. 2023

#8. 서재필의 교육

교육 잡설(雜說)

    서재필은 당시의 유명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굉장히 복잡하고 입체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네이버에는 독립운동가로 표현되어 있지만 저는 독립운동가보다 근대적 교육자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외가인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고, 본가인 충남 논산에서 자랐으며 영특한 자질로 안동김 씨에 양자로 입적됩니다. 19세에 알성시에 급제하고 교서관 부정자(副正字, 종 9품)에 임명됩니다. 이때가 1982년이었으며 당시 개화파인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방영효 등 지도층 자제들을 만나며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8개월간 현대적 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했습니다. 아마도 부국강병을 위해 군사를 조련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의 친정과 궁궐수비대 강화가 1874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1875년에 체결되었고 임오군란이 1882년에 있었으니 지금이라도 군을 장악하지 않으면 개혁이 요원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귀국 뒤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하였습니다. 최초의 근대식 국가 교육기관 설립을 주장합니다. 이때부터 근대식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았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 신정부 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고 고종의 암살 시도로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였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습니다. 집안이 풍비박살이 났습니다. 이 문제는 지금도 서재필이라는 한 사람을 평가하기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당시는 충과 효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길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명문가 집안에서 유교 교육과 과거급제까지 하고도 유교적 사고에서 완전히 탈피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니 평가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미국 독지가의 도움으로 현재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진학하고 병원까지 개업합니다. 이후 갑오경장으로 역적의 문제가 해결되고 귀국합니다.     


    이후 최초의 한글 언론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공화주의를 설파합니다. 또한 배재학당에서 계몽주의 운동을 벌입니다. 이때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듭니다. 이승만을 많이 아꼈다고 하니 아이러니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갈라섰지만 그래도 이 때는 뜻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국운은 기울었고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늦었으며 다른 이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다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참전합니다. 3.1. 운동이 벌어지자 이승만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는 등 재미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이미 미국 시민권자로서 그의 역할은 제한됩니다. 이승만과도 결국 결별합니다. 해방 후 1947년 미 군정 장관이었던 죤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4) 장군의 초대로 귀국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서거하셨습니다. 최근 연구 결과는 하지 장군은 이승만이나 김구보다 서재필 박사가 대통령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연판장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재필은 당시 드물게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에서는 군사훈련을 받았고 미국에서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등 본인 스스로 근대 교육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생생한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미국이 의학 공부를 하며 조선의 문제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서 첫째로 교육의 혁신을 꼽았습니다. 서재필은 교육의 혁신을 추구하여 국민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는 서양의 교육 체제를 연구하고, 이를 도입하여 국민들의 교육 수준을 높여 자강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서재필은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해 산업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는 외국 기술을 도입하고, 국내 기술의 개발을 촉진해서 국가 산업화를 이뤄야 부국강병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후에 우리나라가 과학기술 교육을 국시로 내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본파와 달리 서재필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에 대한 항거 정신을 불어넣고, 국민들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서재필은 근대 국가의 모습을 이루려 노력하였으며, 그가 추구한 국가의 모습은 교육 수준이 높은 문명국이며, 경제가 발전하여 모두가 잘 살고,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는 나라를 꿈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론자이지만 그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재필의 꿈을 담기에 조선은 너무나 과거 지향적인 나라였습니다. 이미 무너진 나라를 되살리기에는 미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교육은 그렇게 문제투성이고 비현실적이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비상식적이고 문제투성이의 인재양성 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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