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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Dec 18. 2023

#3. 플라톤의 교육 이데아

교육 잡설(雜說)

#3. 플라톤의 교육 이데아     


   플라톤(Platon, BC 427 ~ 347 추정)은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어서 길게 이야기하면 오히려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교육관과 관련한 내용만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테네 정계는 매우 복잡한 상태였습니다. 소위 아테네식 민주정과 30인의 참주정이 정계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플라톤은 <국가(Politeia)>에서 대놓고 민주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비난했으며 참주정은 최악의 정치체계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그는 엘리트에 의한 독재를 주장하는 한편 초기 공산주의 이론의 개념을 세우기도 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해군으로 참전해 권위가 커진 평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민주정을 요구했고 귀족들과 대립했습니다. 철학 사조는 변론을 담당하던 소피스트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소크라테스라는 특별한 스승을 만났고 플라톤은 그 산하에서 가장 인정받는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대부분 귀족, 부유층, 과두정 지지자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실권을 장악한 평민들에게 그는 눈에 가시였고 결국 죽음을 맞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귀족 편에서 정치를 하라는 가족의 청을 뿌리치고 이탈리아(시칠리섬의 시라쿠사의 참주정에도 참여)로 여행을 떠납니다. 여기에서 변증법과 피타고라스 학파를 접하고 학문을 넓힙니다. 아테네로 다시 돌아와서 아카데미아(Akadēm(e) íā)를 설립하고 교육과 저작에 몰두합니다.      

플라톤 시대의 아카데미아를 그린 모자이크화

   잘 알려진 것처럼 아카데미아 최고의 제자이자 교사가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BC 322)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아테네 사람이 아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 학장이 되지 못하고 플라톤은 조카에게 물려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연과학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가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은 그리스 북쪽의 스타게이로스라는 마을이었고 마케도니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필리포스 2세 아버지의 주치의였고 그는 왕자와 친구 사이였습니다. 즉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아테네-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이 시작된 지 4년째 되는 해에 태어났으며,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이유로 BC 399년에 죽었으며 전쟁은 BC 404년에 아테네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으니,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후 9년 후 필리포스 2세는 BC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분쇄하여 그리스의 정치적 독립을 종식시켰습니다. 그가 꿈꾸던 ‘이상국가’, 이데아를 보지 못했고 인류 유산인 민주정을 비난했으며 제자도 떠나보냈으니 어떻게 보면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지만 그는 보다 근원적인 것을 탐구하기를 원했고 ‘지혜’라는 꺼지지 않는 불씨를 남겼으니 인류의 영원한 스승일지 모릅니다.     


   그는 이러한 그의 삶의 경험을 자신의 철학과 결부해서 저작에 녹여냈습니다. 특히 교육을 강조하며 인간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발달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의 철인 정치와 연결되고 당시 민주정(중우정치, 리더를 제비 뽑기로 정하는 방식)에 대한 부정을 통한 소수 엘리트 정치화 연계됩니다. 당연히 그는 어떤 사람이 엘리트(철인)이고 어떻게 양성해야 하는지 대화를 통해 밝힙니다.      


    그는 철인(哲人) 리더와 수호자들이 다스리는 이상 사회를 그리며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합니다. 간략하면 플라톤은 국가에서 철학자의 역할, 이데아론, 시가의(詩歌)의 위상, 영혼의 불멸성도 다룹니다.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를 통해 선의 이데아(동굴의 비유로 선의 이데아를 설명)와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학문으로 수학, 기하학, 천문학, 변증론, 화성학을 꼽고 수호자(철학자)의 선발과 교육방법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철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Page of the Codex Parisinus graecus 1807. Dialogue Politeia.


    플라톤의 교육을 단계별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陶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음악·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정서적 방면에 해당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교육하도록 주장합니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도야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쳐야 하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기초군사훈련 개념이며, 어떤 곤경에서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心身)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수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도록 합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 교과로써 수학·기하·천문·화성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습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습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 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협의(狹義)의 변증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습니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 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했습니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습니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양성합니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론이었습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프로이트, 에릭슨, 피아제로 이어지는 아동발달 이론의 기초 개념을 제시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3세까지 유아는 공포나 고통, 슬픔의 감정을 경험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유아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습관에 의해 성격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면서 유아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것은 아이를 방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으로 플라톤은 성격 형성에 있어서 초기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경험으로 인간의 성격이 수정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하였습니다.      


    아동기에는 이성이 성숙하지 않기 때문에 아동교육은 주로 음악이나 스포츠 등에 중점을 두고 같은 또래와 어울리며 사회성 발달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은 6세가 되면 “남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놀게 하라”라고 하면서 성의 분리도 주장하고 아동기 성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청년기가 되면 이성이 비로소 나타나고 이성적,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공부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자 이제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는 이미 2,400년 전 사람이며 사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관련한 연구를 했고 결함이 있음에도 공부하는 것은 근원적인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변증법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피력합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정을 비난했던 플라톤은 당시 아테나와 전쟁을 하고 승리한 스파르타의 여러 제도적 개념을 차용합니다.      


   한 국가의 통치자가 될 사람은 동굴 안의 현상 세계가 아닌 동굴 밖의 실재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통치자는 ‘좋음’의 이데아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결코 쉽지 않고 저절로 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사회적 동물이라도 무작위로 태어나서 양육되고 우연히 지도자가 될 경우(욕심만으로) 개인이 문제가 아닌 ‘국가’의 존립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계획하에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교육 개념이 출발합니다.     


   일단, 예비 교육 단계에서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을 가르친다. 이 과목들은 감각의 세계에서 예지의 세계로 영혼을 인도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반드시 이성이 세워지고 판단할 수 있는 나이에 공부를 하도록 합니다. 이성이 불안정할 때 공부하면 알키비아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를 지휘하고 패배로 이끈 인물, 중우정치의 대표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알키비아데스 1, 2에서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를 대화하도록 하여 그를 비난)처럼 리더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 국가 존망이 걸린 위기의 순간 리더가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예비교육은 철학 교육을 위한 서곡입니다. 그는 특히 수학이야말로 지성만을 사용하여 실제로 향하는 학문이므로, 우리의 영혼을 진리와 빛으로 이끌어 준다고 믿었습니다. 두 번째 필수 과목은 기하학입니다. 기하학 역시 우리의 사유를 전환하는데 도움을 주고 ‘좋음’의 이데아를 쉽게 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입니다. 플라톤은 유랑 시절 피타고라스학파를 접하며 크게 감명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이집트와 중동에서는 여러 수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플라톤도 아카데미아 주요 과목으로 수학을 설정했습니다. 두 가지를 나누어 말하고 있지만 사실 수학입니다.      


    대수학이 아직 크게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하학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특히 플라톤의 수학은 기원전 300년 경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하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책 자체가 플라톤의 수학과 여러 추가적인 자료를 모아서 만든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학문을 연구한다기보다는 기하학을 거의 신처럼 우상화할 정도였습니다. 플라톤은 기하학의 완전함을 신의 선물로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소피스트들의 변증을 궤변으로 생각한 플라톤에게는 완벽한 이데아의 단면을 수학이 보여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필수 과목은 천문학이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사물의 운동을 통해 질서와 조화를 통해 인간 사회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문학이야말로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자연과학이 편중되었다고 생각하며 더 다양하고 깊이 있게 자연과학을 연구합니다.     


   마지막 과목이 화성학인데 천문학에서 천체들의 조화를 배웠으니 이번에는 청각을 이용해 소리의 조화를 배우는 개념입니다. 눈으로 천문학을 보며, 귀로 화성학을 듣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자연과학을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하고 인간들이 재능과 성격을 고려해서 선별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협력하여 국가를 이루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교육이 필수교육과목이 되며 이 과정에서 성적을 관리합니다. 성적을 통해 그들의 직업, 신분이 정해지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예비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면 다시 우수한 사람들을 선발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철학(변증법)을 교육합니다. 이때 변증법(변증술)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킵니다. 변증법은 통치자가 될 젊은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최종 학문이자 최종 관문입니다. 변증법의 원래 의미는 대화술 또는 문답법이라는 뜻입니다.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엘레아학파의 제논(Ζήνων ὁ Ἐλεάτης, BC 495~430)은 변증법을 “상대방이 주장하는 말의 잘못된 점을 증명하면서 내 주장의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방법입니다. 이 논증으로 정교해진 관념만이 선의 이데아입니다. 당연하게도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알키비아데스처럼 지조가 없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도 변증법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나이(30세)가 된 사람 중에서 다시 선발된 이들에게만 이 훈련을 시킵니다. 변증법 교육은 5년 동안 이루어지며 35세가 되면 이들은 다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아야 하고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전쟁에 관련된 일들을 지휘하거나 관직을 맡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유혹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잘 버티는지도 시험도 받습니다. 이 기간은 무려 15년이나 됩니다. 이제 50세가 되었고 맡은 임무를 잘 해내며 실무와 학술 면에서 두루 우수하다고 인정되면 드디어 최종 목표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그들이 선 자체를 봤다면, 그것을 본보기 삼아 국가와 개인과 자신을 차례차례 정돈하며 여생을 보내게 해야 하네.”라고 합니다. 맹자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에 대해서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의 왕 노릇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부모가 생존해 계시고, 형제에게 별일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올려보아 부끄럽지 않고, 내려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을 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했으니 동서양의 대표적 철인의 생각이 비슷합니다.      


   이 시기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철학으로 보내게 하되 철학(변증법)을 주요 과제로 하고, 자기 차례가 오면 통치자가 되어 국정을 보살핍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진정한 철학자들이 여러 명이든 한 명이든 국가의 권력을 장악해야 하네, 올바른 것과 올바른 것에서 비롯되는 명예들을 가장 높이 평가할 것이네, 그리하여 그들은 정의를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길라잡이로 삼아 정의에 봉사하고 정의를 증진시키면서 국가의 질서를 바로 잡아갈 것이네.”라고 하며 명예, 정의, 국가 질서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를 철학자가 해야 한다는 철인 정치를 주장합니다. 유대교의 랍비, 우파니샤드 철학의 구루 등과 유사한 개념이면서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플라톤은 또한 “그들은 열 살 넘은 시민들은 모두 농촌으로 내려보내고 아이들만 맡아서 부모들이 지닌 현재 습성에서 벗어나게 한 뒤, 우리가 앞서 논의한 바 있는 그들 자신의 생활 태도와 법률로써 양육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스파르타처럼 공동육아, 교육을 제안합니다. 부모들의 각각의 개성으로 국가가 필요한 인재 양성이 제한된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 자유의지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동굴과 같은 한정적인 공간에서는 가능하지만 인간 본성을 무시하는 등의 현실적 한계는 분명합니다.      


    로마의 5 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는 철인왕(플라톤의 철인)으로 불렸으며 그도 그리스 철학을 신봉했고 명상록도 그리스어로 저술할 만큼의 소양을 갖췄던 사람입니다. 그는 출산율 감소로 인한 로마 제국의 쇠퇴를 우려하여, 다양한 출산율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아우렐리우스의 출산율 정책 중,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 결혼한 부부에게 세금 감면, 토지 할당, 공공 직위 우선 선발 등의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그 외에도 다산 가족에게 금전적 보상과 명예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성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낙태와 혼외 성관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제(賢帝) 중 한 명인 그도, 딸과 제위를 물려준 아들인 코모두스 조차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분명한 모양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그리고 플라톤은 자기들과 같은 또 다른 사람들을 교육해서 국가의 수호자로 양성하고 드디어 ‘행복의 섬’을 향해 떠납니다. 국가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제물을 올리는 의식도 행합니다. 이러한 통치자는 남성과 여성에 상관없이 누구나 해당됩니다. 물론 이런 국가와 제도를 현실에서 실현하기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는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결코 훌륭한 통치자와 국가가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국가를 좀 더 빨리 이루기 위한 묘안을 내놓습니다. 바로 국가가 국민들의 교육 전체를 관리하는 겁니다.     


   출생에서 10세까지, 10세에서 20세까지, 20세에서 30세까지 이렇게 3단계로 나눠서 국가가 엄격하게 통제하고 지도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당시 아테네의 교육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유아에서 7세에 이르기까지는 보통 노예들과 부모들이 가르치고 7세에서 13세까지의 초등 교육, 13세부터 16세까지의 중등 교육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대의 그리스뿐 아니라 로마와 이집트도 읽기, 쓰기 능력은 사실상 서기들의 일이었습니다. 문자 교육도 당연히 도제식 교육이었습니다. 수사학이나 철학의 교육이 비형식적인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주장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제 더 이상 사교육은 안 되고 완전한 공교육 체계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은 각 가정에서 각종 놀이 지도와 신화를 통해 조기 교육을 통해 모든 아동들이 같은 시기에,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고 아이들이 10세가 되면 건전하고 새로운 교육을 위하여 부모로부터 격리하고 모두 시골의 교육기관으로 보내도록 합니다. 부모들은 세파에 물들어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모인 아이들은 각자가 타고난 소질과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학습은 강제로 시켜봤자 머리에 남는 것도 없으니 차라리 놀면서 키우는 게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0년이 흐른 후 20세가 되면 해야 할 일을 구경시키고 그에 적합한 경험을 쌓도록 하고 30세가 되면 앞서 말한 방식으로 선발과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한 철인 통치자를 양성하기 위해 이와 같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방법을 주장했습니다. 플라톤도 이상국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데아론의 연장선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질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소 유머러스 하지만 날카롭기도 합니다.      


“학문에 대해 날카로운 이해력이 있어야 하며 어렵게 배워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혼은 체력단련을 할 때보다 힘든 교과목을 배울 때 훨씬 더 주눅 늘기 때문이네. 배우는 노고는 혼에만 국한되고 몸과는 무관하므로 본래 혼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네.” 이해력이 부족한 아이는 주눅 들고 힘들기 때문에 기본 재능이 있는 아이들만 고등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엘리트 교육이라는 비난을 염두에 두며 “만약 우리가 사지와 마음이 바른 사람들만 그처럼 엄청난 학습과 수련을 받게 하여 그들만을 교육한다면 정의 자체도 우리를 비난할 수 없고 우리도 국가와 정체를 구할 수 있겠지만, 만약 우리가 엉뚱한 사람들을 데려와 그들이 그러한 학습이나 수련을 받게 한다면 정반대 되는 결과를 초래할뿐더러 철학을 지금보다 더 웃음거리로 만들 테니 말일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엘리트 교육이 비난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더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교육 방법도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것이니 당연히 자유로운 교육을 주장합니다. 어딘지 요즘 유행하는 창의 교육과 연결 됩니다. “자유민은 어떤 교과목도 노예 같은 방법으로 배워서는 안 되기 때문일세, 육체적인 노고는 강제로 수행된다 해도 몸을 전혀 해치지 않지만, 혼의 경우 강제로 배운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네”라고 말하며 놀이 공부방법을 이야기합니다. 2,400년에 플라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 교과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되 강제적인 방법을 쓸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재미로 배우게 해야 하네, 그래야만 자네는 아이들이 저마다 어떤 적성을 타고났는지 더 잘 알 수 있을 걸세”


   <에밀(Emile)>의 저자 쟝 자크 루소(Rousseau, 1712-1778)는 <국가>의 신봉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자연주의 교육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직관적이고 쉽습니다. 그리고 왜 체력단련 기간을 별도로 구성하는지 이유도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필요한 체력단련을 마친 뒤에, 2년이 걸리든 3년이 걸리든 이 기간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은 할 수 없기 때문이네. 피로와 졸음은 학습의 적일 뿐만 아니라, 저마다 체육에서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젊은이들에 대한 아주 중요한 시험의 하나가 될 테니 말일세.” 이 말에는 왜 근대의 철학자들이 교육에서 체육을 중요시하는지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체력을 단련하는 이유는 수호자가 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군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지원, 선발할 때 체력은 필수적입니다. 또한 공부하기 위한 기초체력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체육(스포츠) 등의 육체적, 단체 활동을 하며 아이들은 극단적 환경에 놓이게 되고 위기의 순간 정체성이 확립되거나 드러난다고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루소의 에밀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플라톤은 너무나 과거의 인물이고 철학자이자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무조건 신봉하거나 경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매우 심오하고 난해할 수 있지만 그의 논지는 분명합니다. 너무나 이상적인 국가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도 당연히 그런 생각이었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다만 플라톤은 백척간두에 놓인 아테네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관념은 이상적인 개념인 동시에 현실과 동시어입니다. 빛과 어둠처럼 존재합니다. 각론으로 보면 이상적이고 구태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학이나 많은 종교의 교리처럼 수많은 사람이 연구하고 깨달음을 얻는 등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근대의 모든 교육의 시발점에는 플라톤이라는 거인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말처럼 ‘플라톤이 국가처럼 완벽한 조화는 천국에서만 존재한다’ 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화를 이루는 것은 더 요원해지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각각의 민족마다 좋아하는 숫자가 있습니다. 서양사람들은 대체로 숫자 3을 좋아합니다. 삼단논법, 진선미, 3악장/3막, 논술 구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슬람교의 3곳의 성지, 삼위일체 등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플라톤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숫자 3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숫자 3을 완벽함, 조화, 균형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숫자 3에 대한 생각을 저서 곳곳에서 남겼습니다. 그는 우주를 이데아, 영혼, 물질의 3개의 세 개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삼각형(정삼각형, 이등변삼각형, 직각삼각형)과 대응시켰습니다. 또한 국가의 계급을 철인, 수호자, 생산의 3계급으로 구분했으며 영혼을 이성, 기개, 욕망의 3개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우주의 근본원리를 진선미로 구분해서 인간 삶의 목표를 이 세 가지 원리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 국가, 민족이나 타고나기도 하고 반복적으로 교육되기도 하는 고유의 개념이 존재합니다. 신화, 종교, 철학, 문학, 역사 등 여러 경로로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방법이 체계적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개인별로 할 수도 있지만 여하튼 지속적으로 전파되고 확대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특질은 어떻게 전해지고 유지될까요? 또 플라톤의 주장처럼 개인별 특성이 교육으로 판별되고 양육되거나 개선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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