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대한 영화이니 그림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나타난 모노리스처럼, 감독부부의 집에 커다랗고 검은색 투성이의 그림들이 배달된다. 100호 사이즈엄청난 크기의 그림들이 작은 공간에 가득 찼고 공간의 주인들은 무인전시를 기획한다. 모노리스에 낯설어하던 중 다가가 만져본 스탠리큐브릭 영화 속 그들처럼, 감독부부는 낯선 그림 앞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손대신 눈으로 빛과 그림을 만져보고자 했다. 감독부부가 이미 알고 지냈던 박세진 작가는 빛과 어둠을 잘 다루는 화가였다고 한다. 노련한 화가의 화풍에 대해 알고 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촬영감독으로서 카메라를 다루는 직업정신의 발로였을까? 그림 앞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빛과 그림의 변화성을 6개월간 촬영하여 그 결과물을 들여다본 감독부부도 나중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카메라에 촬영된 영상 속 화면엔 전혀 다른 그림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 같은 그림이었는데, 시간의 변화에 따른 빛의 흐름에 그림이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일으키는 음악과 함께 빛이 극장화면 왼쪽을 비추면서 점차 중앙으로, 오른쪽으로 흐른다. 어두움뿐이던 그림에 갑자기 수없이 덧칠을 했을 붓질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매직아이처럼 눈을 오롯이 떠서 화면을 응시한다. 저건 바다일까? 오솔길일까? 나뭇잎일까? 점차 밝아오는 오른쪽에서 거대한 벽이 나타난다. 절벽 같다. 저건 해안가의 밤을 그린 것이구나. 무수히 많은 밤바람에 맞서 내었을 만큼 강한 절벽의 위상이 느껴진다. 아닌가? 방파제의 옹벽 같기도 하다. 작가는 왜 이 밤바다에서 저런 검은 방파제를 화폭에 그린 것일까? 갑자기 방파제의 육중함에 숨이 탁 막힌다. (그림 '시멘트는 마주 보는 삶에 따라 달라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절벽도 아니고 바닷가의 방파제도 아닌 시멘트 벽이었다. 시멘트 옹벽아래 낙엽들이 쌓여 쓸쓸한 가을길을 그린 것으로 저 시멘트길 끝에 한 남자가 걸어간다. 왠지 저 남자가 '나'이고 싶었다. 10월의 어느 날, 나 혼자 이런 낙엽 깔린 길을 차분히 걷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은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란 걸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주고 싶은 걸까? 빛이 훑고 간 그림이 어둠 속에서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다.
박세진 화가의 그림 <시멘트는 마주 보는 삶에 따라 달라진다> / 빛의 밝기에 따라 저 옹벽의 형체와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두 번째 관람 때 다시 감상을 하게 된 그림이 있다. 그림이 너무 어두워 빛의 변화에도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시골마을 같기도 하고 산속 풍경 같기도 하였다. 어두움으로 그냥 붓칠만을 하고 싶은 화가의 마음속이려니 하는 생각도 첫 관람 때는 했었다. 영화상영 후 그 그림이 남원 쪽 어디 마을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고 들었다. 그림 왼쪽 편에 작은 노란색 점하나 가 있는데 그게 창문으로 비치는 불빛이라는 것도 알았다. 설명을 듣고 다시 영화를 보니 빛과 마주한 마을풍경이 색다르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영화를 보던 중 밤 마을 풍경을 보며 점차 밝아지는 빛을 따라오다가 깜짝 놀랐다. 이런! 완전히 어두운 그림에 별이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낮시간대 전시공간에서도 보이지 않던 별이 저 어두운 그림 위쪽에서 하나씩 하나씩 빛나고 있었다. 화가는 검은색 하늘에 아주 작은 스크레치들을 찍어 놓은 모양이다. 어두운 극장 안 스크린에 별이 빛났다. 빛이 하늘을 비추고 사라지자 그 여명에 별빛들이 반사감을 보여주는데 가슴이 떨렸다. (그림 '남원 만인의총')
박세진 화가의 그림 <남원 만인의총> / 밝은 빛 아래서도 그림엔 어두움이 가득하다
큰 화면 속 그림의 캔버스에선 두꺼운 붓터치의 질감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없이 덧칠을 했을 물감의 두께를 바라보며 화가의 수고와 고집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엄청난 크기의 화폭에 수많은 물감과 커다란 붓으로 이미지를 그려냈을 박세진 화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뿐인가! 화가는 빛과 어두움을 다루는데 엄청난 에너지와 창의성을 발휘한다. 빛을 따라 자기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연구하며 붓질했을 것을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화가의 눈은 일반인과 달리, 가시광선의 파장 밖을 바라보는가? 어두움 속에 자기의 영감과 이미지를 펼쳐놓은 화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그렇게 무인전시 속의 그림들을 천천히 훑던 화면은 정지된 공간 속의 사람들과 바람, 노랫소리와 안내공책의 글씨들도 보여준다. 코로나로 단절된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연결되려 아이디어를 내 무인전시회로 만난다. 소통은 대화대신 글씨로 한다. 손으로 무언가 만져야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소통과 발전은 손으로 쓴 글씨를 '보는 것'으로도 진행되었다. 황다은 감독이 직접 썼다는 무인전시회 안내공책은 밖의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도구이자 물질이다. 전시회를 다녀갔을 누군가의 사람들이 그 안내문을 보고 따라갔을 것이다. 유한한 공간 속 사람들은 계속 바뀐다. 시간에 따라 사람도 바뀌고 빛도 위치가 변한다. 영화가 주로 비추는 오후 3시 경의 전시공간은, 그래서 비슷하지만 다르다. 관람객도 다르고 바람소리도, 라디오 소리도 다르다. 기획한 것은 하나도 없이, 감독부부는 그저 공간과 시간 속의 우연성을 보여주고 싶었노라 했다. 알고 나서 영화를 보면 평이한 일상을 왜 편집과정에서 덜어내지 않았는지 이해가 된다.
지루했던 코로나가 끝나가는지, 시계는 빨리 감아지며 본격적으로 우리네 삶이 바빠지리라, 혹은 바빠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힘껏 뛰놀았을 성미산 놀이터에 공사를 한다며 출입금지한 테이프들도 비춘다. 코로나가 끝나도 돌아갈 곳 없는 아이들, 놀이터로 돌아오지 못할 아이들의 슬픈 마음이 느껴진다. 무인전시를 끝내고 이제 관람객들과 직접 만나서 전시회를 열어야 하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어두운 그림을 어둡게만 볼 것이리라. 출입금지 테이프가 쳐진 '눈 덮인' 놀이터가 어떤 형상을 가진 놀이터인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없으면, 어두운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보지 않으면 그림의 진실함을 마주할 수 없는 것처럼. 눈이 녹으면 사람들은 놀이터의 원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영화는 닫혀있던 전시공간을 떠나 광화문 거리를 비춘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감독은 특수카메라 장비를 활용해 거리의 빛과 공기, 차량과 사람들이 지나는 광화문 거리를 촬영하였다고 했다. 마침 광화문 거리에 나갔을 때, 반대쪽 거리에서 세월호 4.10 기념일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한다. 한쪽에선 아이들을 추모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이 걷고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풍경이 감독은 생경했다고 했다. 우리가 서있는 공간은 정지되어 있지만, 그 속의 시간과 사건은 다르다. 그 다름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물질들에게 적용된다. 감독부부는 그것의 우연성들을 이 영화에서 표현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면은 다시 거꾸로 되감긴다.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늙어 죽은 주인공이 다시 아기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어두운 그림이 마치 검은색 모노리스처럼 보여서, 낯선 엠비언트의 음악들이 묘한 긴장감과 떨림을 제시해서, 깨달음의 방식과 해석의 자료가 비슷해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떠올랐던 영화 <풍경 드리프팅>. 박홍열, 황다은 감독의 <2024 빛과 공간의 이미지 오디세이>로 영화 부제를 달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영화로서 극장에서 개봉한다면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이다. 어두움을 다루는 박세진 화가의 작품도 극장과 전시관에서 다시 만나면 너무 반가울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영화 '풍경 드리프팅'. 빛과 어두움을 다루는 화가들과 이색전시를 열고 싶은 미술관, 그리고 이들 장소에서 카메라를 활용해 다양한 협업을 기대해 보는 것도 좋겠다.
예술작품을 시간선 위에 서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들!
사물을 바라보며 빛과 색을 어떻게 펼쳐 보일까 고민하는 화가, 예술작가들!
공간과 시간 속의 사물 및 사람들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관람하면 정말 좋은 영화이다. 내 눈이 보지 못하고 내가 없던 곳에서 여전히 전시되어 보였을 그림들과 예술작품들을 다시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