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도 중책을 맡아 일하다 보니 셋이나 되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 대형 INGO의 본부에서 참모역할을 하려니 기관장의 휴가에 내 휴가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바쁜 일정상 기관장과 참모진들의 여름휴가는 극성수기인 7말 8초로 암묵적인 합의가 생겼고 이때 같이 1주일간 휴가를 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아내도 돌봄 교사로 일하면서 7월 말 1주일 간만 여름휴가를 쓸 수 있어,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7말 8초 극성수기 휴가철에 같이 쉴 수 있는 1주일이 주어졌다.
한집에서 세 자녀를 돌봐주시던 어머니도 우리 부부가 쉬는 여름철, 휴가를 가셔야 하는데 다른 자녀들이 딱히 어머니와 같이 휴가를 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무더위가 심한 7월 말에 6명의 대가족이 집안에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일에 치인 부부는 오랜만에 얻은 여름휴가 때 집에서 6명이 다시 부대끼느니 일단 어디로든 나가보기로 하였다. 한여름철 전국 여기저기 다니며 아이들과 추억을 쌓곤 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도 많고 물가도 비싼데, 아이들 3명을 데리고 잘 수 있는 숙박지를 고르기도 쉽지 않았다.
막내 아이가 조금 크면서 아이들한테 해외 가족여행에 대해 의견을 물어봤고 어린 막내는 오빠랑 언니만 같이 간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다. 첫째, 둘째 아이는 아빠엄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2007년 둘째 아이와 함께 5명이 갔던 홍콩/태국 여행에 대한 경험이 6명도 같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족들에게 은연중 심어준 것이 아닐까?
여름휴가일정을 짜던 것이 2014년 5월 말이었는데, 바쁜 업무 탓에 여기저기 알아보기 힘들었다. 애초 우리 부부는 패키지여행에 관심이 없고 2007년 어머니와 둘이 같이 갔던 중국 패키지여행에서도 너무 실망했기에 여행사 패키지 상품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같이 일하던 직원이 신혼여행으로 필리핀 팔라완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길래 무작정 2014년 가족 여행지를 필리핀 팔라완으로 정했다.
결혼할 때부터 모든 준비는 내 몫이었다. 결혼식 장소부터 신혼여행지까지, 사는 집까지 다 내가 정했다. 유럽여행을 갈 때도, 국내 가족여행을 갈 때도 아내는 딱히 기여하는바 없이 (물론 상당 부분 많은 경비를 댔다^^) 내가 준비하고 계획한 일정을 따라다녀주었다. 둘 다 바빠서 여행준비에 시간과 관심을 쏟기 힘들었지만, 나는 퇴근 후 밤에 온라인으로 여행준비를 하고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며 어린이집과 학교 보낼 일을 점검했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분장해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행준비와 일정추진은 내 몫이었다. 내가 준비한 여행지와 일정에 대해 군말 없이 따라오고 좋아해 준 덕에 가족들 모두 편안한 여행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매년 여행을 온라인으로 직접 준비하다 보니 조금씩 가족여행에 대한 경험과 식견이 쌓아갔다. 물론 직장에서 해외출장도 종종 있어 해외여행을 알차게 준비하고 여러 정보들을 분석할 수 있는 지식도 쉽게 쌓을 수 있었다. 처음엔 그냥 인**크에서 항공권을 비교하면서 6~7월경에 비행기표를 발권하곤 했는데, 온라인 여행카페에서 개인여행에 대한 각종 지식들을 공부하며 조금씩 저렴한 비행기와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2014년 필리핀 팔라완 여행은 너무 좋은 추억을 가족들에게 선사하였다. 오랜만에 나간 가족해외여행이라 그런지 다소 무리스러운 일정과 많은 경비지출이 있었는데 여행 후 1년 동안 구멍 난 집안재정을 막느라 꽤 고생했었다. 아내는 돌봄 교사로, 나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니 급여가 충분한 상황은 아니다. 게다가 6명의 대가족이 살아야 해서 방이 여러개인 큰 집을 구하다 보니 빚도 꽤 있었다. 다행히 아내와 나는 낭비를 하지 않는 편이고 소비 트렌드에 민감한 편도 아니어서 쓸데없는 지출이 많지 않았다. 취미활동이나 지인들 모임에 자주 참여할 수 있는 시간적/상황적 여유도 없다 보니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의 해외여행에 집중할 수 있는 경제력이 된 듯하다.
그렇게 매년 '저축+여행경비절감 노하우 공부+1년 전부터 여행준비+약간의 대출과 상환'이라는 공식을 만들면서 가족해외여행의 결심을 만들어 왔다.
해외여행의 경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항공권이다. 온라인 카페를 통해 동남아시아에 많은 노선을 운영 중인 '에*아시*'라는 항공사를 알게 되었고 여기서 여행 1년 전부터 항공권을 싸게 파는 프로모션을 진행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잦은 고장과 지연으로 악명이 높은 항공사로 여러 사람의 불만이 많았지만 2015년 이후 이 항공사를 수차례 이용하면서 한 번도 고장과 지연을 경험하지 못했다. 2019년 코로나 감염병이 돌면서 1년 전에 결제한 항공권 금액을 되돌려 받지 못해 약간 고생했으나 5개월 만에 되돌려 받긴 했으니 손해 본 일도 없다. 과거엔 '세부퍼*픽' 같은 저가항공사에서 100페소 프로모션 같은 이벤트도 진행하곤 했으나 이런 최저가 발권행사는 나와는 상관없는 행사였다. 그냥 마음 편히 1년 전에 여행지를 정하고 날짜를 확정 지은 다음, 발권가능한 항공사에서 발권하는 게 직장인이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길이다. 살짝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씩 준비하면 직장생활에서도 성공하고 여행준비에서도 성공하는 법이라는 것을 배웠다.
항공권을 발권하면 현지 여행일정을 정해야 한다. 여행전문 책자를 보면 당일치기부터 한달살이까지 일자별 추천여행일정이 아주 잘 나와있다. 내 일정에 맞춰 한 두 개 일정을 선택한 후, 여행전문 온라인 카페 게시글을 찾아보거나 웹서핑을 해보면 그 일정을 경험해 본 1~2명이 꼭 있었다. 그 사람한테 메일을 보내거나 문의하면 친절하게 답을 주니 역시 우리나라 살기 좋은 나라다. 우리나라에 아무도 없다면 영어로 구글링 하면 된다. 배낭여행객이 전 세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있다. 어린아이와 나이 드신 어머니와 함께 여행 가는 내가 세상 어딘가의 첫 모험가가 될 필요는 없다. 가족들 취향에 맞춰 볼거리를 정하고 그 주변의 먹거리를 찾아 일정을 만들면 여행이 실패할 확률이 확 낮아진다.
일정이 정해지면 그다음은 숙소정하기다. 아이들이 쉽게 지칠 수 있기에 숙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6명의 대가족, 3대가 같이 묵으려면 방도 여러 개 필요하다. 아이들이 어리니 어머니는 첫째와 둘째가 함께 자고 셋째는 우리 부부와 같이 방을 배정하였다. 그래서 3명이 같이 한 방을 이용할 수 있는 숙소를 찾는데 집중하였다. 숙소의 위치나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여행의 기본원칙인 '처음에 안 좋다가 나중에 좋아지는 숙소'를 선정하는 요령도 필요하다. 다만 기본원칙일 뿐 반대로 해도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가족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과 그 순간이 중요하지 숙소의 퀄리티가 중요하겠는가? 때로는 여행 첫날 리조트급 호텔에서 시작하고 여행 마지막날은 관광지 외곽의 펜션이나 야영장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때그때 모두 좋은 시간이었다.
보통 해외여행의 숙소를 잡기 위해 여기저기 숙박전문 글로벌 온라인 업체들을 둘러보는데, 대체로 광고비를 많이 집행하는 곳들이 1~2페이지에 나오니(그만큼 비싸다는 뜻)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검색을 하곤 했다. 여행 4~5개월 전에 숙박지들의 예약이 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일단 예약취소가 자유로운 숙박지들을 2~3곳 예약하고 여기저기 후기들과 사진들을 찾아본다. 또 그 숙박지에 직접 아이들이 몇 명이고 나이 든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여행임을 알려준 뒤 숙박지에서 친절히 답변을 주는 곳을 선정하면 3대가 함께 묵는데 불편함이 거의 없었다. 사람 많은 곳과 시끄러운 곳은 온 가족이 싫어해서 살짝 관광지랑 떨어진 위치의 숙소를 정하면 되었는데 구글로 거리모습을 볼 수 있어 후기랑 비교하며 선택하면 거의 후회가 없다.
여행을 준비하는 적당한 때란 없었다. 3대가 함께하는 해외가족여행을 진행하기에 적당한 때도 없었다. 모두 다 같이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가 여행짐을 싸는 시기였고 여행의 극성수기는 1년 전 항공권 발권으로 맞섰다. 취미생활 줄이고 입는 것 먹는 것 조금 줄이면서 여행경비를 마련하며 여행 후엔 다시 긴축재정으로 펑크 난 재정을 메꿔 나갔다. 지금 돌이켜보니 잘 한 결정이었다.
아이들은 금방 커서 이제 같이 다니려고 하지도 않고 어머니는 더욱 연로하여 잘 걷지도 못하신다. 아이들아 나중에 좋은데 가자, 어머니 나중에 모시고 갈게요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자기 형편껏 지금 시작하면 된다. 꼭 해외여행이 아니어도 좋다. 집 근처 관광지라도 같이 나서려는 '시작'이 중요하다.
한번 시작하니 그걸 기획하고 준비하는 관심과 노력이 내 일상을 붙잡고 이것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행을 가겠다는 결심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