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딸이오

식스센스여행기 13 - 딸아이 입장에서 쓴 식스센스 여행기 / 둘째편 1

by 구르는 소

결혼후 몇명의 자녀를 낳겠다는 계획은 따로 하지 않았는데, 아내와의 유럽여행중 의도치않게 둘째를 갖게 되었다. 열흘간의 유럽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볼려고 하는 여행 3일차에 감기기운이 있던 아내는 별다른 의심없이 감기약을 먹었고 나중에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뱃속에서 아이는 잘 자라줬고 온가족이 바라는 여자아이로 우리 가족한테 와주었다. 당시 얘기를 하며 미안해하는 우리 부부한테 사람이 아프면 약먹는게 당연한 것 아니냐며 이제 자기가 체코산인지 영국산인지 쿨하게 물어보는 건강한 딸로 성장해 가고 있다. 세상 모든게 감사한 일 가득이다.

3명의 자녀중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선뜻 누구라고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누가 제일 아빠를 닮았냐고 물을땐 이 둘째아이라고 바로 말할 수 있다. 세명의 아이 모두 조금씩 아빠의 성향을 닮은 것들이 있는데, 유독 둘째아이가 아빠를 많이 닮았다. 다소 다혈질이고 신경질적인 성격과 높은 집중력, 예리한 기억력 등은 나를 빼닮았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언행과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은 눈빛, 흥미를 가졌다가 금방 싫증내거나 아니다 싶을땐 쉽게 포기하는 것도 비슷하다. 숟가락을 잘 쓰지 않고 젓가락으로만 밥을 먹는 것도 비슷하고 젓가락질을 이상하게 하는 것도 예전의 내모습 그대로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않아 상대방을 힘들게 하거나 반대로 의외의 감동을 주는 모습도 닮았다. 키도 나랑 1cm밖에 차이가 안나고 좋아하는 음식도 비슷하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자면, 어릴 적 내모습을 한 여자아이를 보는 것 같다. 딸아이인데 왜 이렇게 아빠를 빼닮은 것이냐. 신기하기만 하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KakaoTalk_20230723_140958514.jpg 오키나와의 해변가에서. 자녀 1명 보다는 2명이 낫고 2명보다는 3명이 좋다.

그래서인가. 키우면서 지금 제일 힘든 아이가 둘째아이다. 서로 잘 아니까 서로 힘든게 아닐까.

학원 등 공부와 운동 등 스포츠활동, 종교활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통해 부모의 부족함을 채우지 않겠다고 우리 가족은 약속했다. 다만, 내가 아이들한테 딱 한가지만 부탁했는데 그건 바로 태권도 4품까지는 꼭 취득해달라는 거였다. 어렸을적 돈이 없어 친구들과 함께 다닌 태권도장에서 나만 떠나야했던 기억이 내 아이들만큼은 모두 4품(단)을 따게 해주겠다는 욕망으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태권도만 다녀주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아들은 태권도 4품을 땄고 막내아이도 곧 4품을 취득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 둘째가 태권도 3품까지만 취득하고 사춘기에 들어가 버렸다.


딸아이는 울면서 정말 태권도는 하기 싫다고 얘기했고 나도 울면서까지 제발 3개월만 더 태권도장에 다녀 달라고 설득했다. 온가족들과 태권도장의 관장님, 사범님들까지 매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체조건도 뛰어나고 운동신경도 좋아 지역육상대회에 선수로 나가고 줄넘기대회에서 입상도 했던 딸아이였다. 몇개월만 참고 도장에 다니면 되는데, 둘째는 끝까지 태권도장에 가지 않았다. 무슨 대단한 자존심이냐며 아빠의 작은 소원 한번 들어주라는 오빠의 충고와 혼냄도 아무 소용없었다. 최신 아이폰을 사주겠다는 물질적 유혹에도 딸아이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때 둘째는 그냥 그렇게 태권도 3품만 취득하고 운동을 접었다.


지금은 연예인 덕질활동에 춤추고 노래부르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로 살고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느라 주말마다 알바를 하고 친구들과 훌쩍 당일치기 서울근교 여행을 떠나는, 무적의 사춘기 소녀이다.




형식에 얽매이기 싫고 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아빠의 성향 덕분인지 둘째 아이는 태어난지 6개월만에 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홍콩을 경유해 태국으로 떠난 첫 가족해외여행중 둘째는 엄마품의 포대기에서 세상공기를 쐬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여행지의 더운 날씨에 서로가 힘드니 아내와 나, 할머니가 번갈아가면서 갓난 아기를 안아주곤 했다. 덕택에 딸아이는 가족들의 품에 여러번 안길 수 있었다. 또 예전 글에서 밝혔듯이 딸아이덕에 외국에서 유모차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여행지의 더운 날씨에 아기도 힘들었는지 밤에 아기가 '아고아고~'하면서 잠들었다고 한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떠난 젊은 부부의 무모함이 놀랍고 아기한테도 미안하다. 반면에 여행기간 울지도 않고 순하게 가족들과 여행일정을 잘 마무리해준 아기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다. 이렇게 둘째는 우리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년 여름이면 여행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셋째아이가 태어나 본격적으로 6명의 가족이 해외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지 둘째아이는 '오빠바라기'였다. 어디를 가던지 오빠 뒤꽁무니를 따라 다녔고 하고 싶은 것은 '오빠가 하자는 것'이었다. 흥이 많고 장난을 잘 치는 오빠 덕에 동생은 어린 시절을 재미나게 보냈다. 물을 좋아하는 오빠 덕에 둘째도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오빠 덕에 옷도 잘 입는다. 그림을 잘 그리는 오빠 덕에 여행지의 풍경도 곧잘 그려낸다. 비행기에서 이어폰으로 음악듣는 오빠를 보고선 다음 여행때 나도 꼭 이어폰을 사달라고 했던 아이다.

사본 -P20161014_123807000_8221CDB4-2CAF-443F-8DC8-3EB6BBE4FD14.jpg 장난꾼인 오빠덕에 둘째는 건강한 체력을 가졌다. 오빠의 자전거는 밀어주고 동생은 자기 자전거 뒤에 앉혀서 데리고 다닌 당찬 아이다.


첫째랑은 본격적으로 사춘기가 시작하기전인 초등학교 6학년때 베트남과 말레이시아를 다녀왔다. 둘째한테도 같은 나이때에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하는말이 '오빠랑 가면 어디든 괜찮다'라는 거였다. 딸과 둘만의 해외여행을 꿈꿨는데 아빠만의 바램일뿐이었다. 결국 오빠가 가고 싶어하던 오사카 유니버샬스튜디오로 가족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생각했던 여행예산의 과다지출이었다. 나중에 딸이 돈을 벌면 여행경비를 다 받아내야할 판이다.


좋아하는 오빠랑 장난도 쳤지만 부모님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많이 맞기도 했는지 딸아이는 맷집도 좋다. 가끔 아들이 장난치며 주먹으로 둘째의 팔뚝을 때리다가 나한테 혼나기도 하는데, 그럴때마다 둘째는 "괜찮아요. 나 맷집좋아요. 어렸을때 아빠몰래 오빠한테 엄청 맞았거든." 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잘 커주어서 감사하다.

사본 -20171002_122734.jpg 필리핀 보홀의 바닷가. 놀거리가 없어도 남매들끼리 모래와 물을 가지고 재미나게 논다.

둘째는 기억력이 좋아 여행날짜와 방문했던 장소 등을 꼬박꼬박 기억해낸다. 한번 가본 길도 잘 기억해서 여행다니다가 길을 잃으면 둘째아이한테 물어본다. 둘째아이가 이 길이 맞다면 그 길이 맞다. 여행중 숙박지등에서 잃어버린 물건도 척척 찾아낸다. 체력도 좋아서 쉽게 지치지 않아 성큼성큼 돌아다니며 숙소의 수영장에서 제일 늦게 나온다. 외국어도 이것저것 말해보려고 여러 국가의 언어에 도전해본다.


어렸을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닌 기억의 잔상덕분일까? 아고아고 힘든 숨을 쉬어가며 맡았던 홍콩 공기와 태국의 풍경을 따라 어른이 되면 전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것만 같은 아이다. 나중에 딸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여행지를 찾았을때 "어? 나 어릴적 여기 아빠랑 와봤었어!" 라고 기억해주면 좋겠다. 아빠의 소원대로 태권도 4품을 따진 않았지만, 다재다능한 둘째 덕택에 경험해보지 못한 경기와 공연 등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기약을 극복하고 세상에 태어나 6개월차에 외국여행을 한 아이.

예민하지만 털털한 성격을 가진 우리집 둘째 딸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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