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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Jun 08. 2022

타고난 예민함이 조금은 도움이 되는 걸까

살면서 위험했던 순간들에 대하여..

가끔 나의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면 몇 가지 무서웠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생각나는 한 가지 아찔했던 순간은 여섯 살 때였다. 일찍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나는 피아노 레슨이 끝나고 늘 그랬던 대로 학원 봉고차를 타고 집 골목길 입구에 도착했다. 골목길 입구에 내려서 혼자 집까지 걸어오는 도중에 나는 어떤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가죽잠바를 입고 짧은 머리에 키는 그리 크지 않고 다부진 체격이었다.

그냥 서로 지나쳐가는가 싶었던 찰나에 그는 내 앞으로 걸어와서 무릎을 굽혔다. 나와 눈을 맞추고 “뽀뽀”라고 씩 웃으며 말했다. 너무나 어렸던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곧 납치될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것인지 떨며 생각하다가 소리를 지르면 해코지당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그 남자가 내미는 양쪽 볼에 입을 맞췄다. 나의 집으로부터는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난 뒤 그는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힘줘 품에 안은 뒤에 갈 길을 갔다. 그때도 지금도 생각하면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나 싶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와중에도 간신히 걸어서 집에 들어갔고 엄마에게 바로 알렸다. 엄마는 놀란 채로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그 남자를 찾으러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엄마로부터 일찌감치 그러한 상황을 만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받았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 닥치고 보니 공포에 질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 살에 겪었던 그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텔레비전이나 뉴스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의 성범죄 피해를 들을 때면 어쩌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던 일이고 내 미래에 아예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보장도 없다.


삼십 년을 여자로 살아왔고 좀 있으면 딸 둘의 엄마가 되는 나의 입장에서는 항상 예민하게 나를 지키고 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예민함이 발동한다. 더더욱 험해지는 이 세상에서 내 딸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지 아직 자신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찍부터 눈높이 교육을 하고 수시로 강조하며 그리고 또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샌프란시스코 중심에서 살았었다. 미국 시골 동네에서 같이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한 동생과 함께 방을 구해서 같이 살았는데 집을 구한 지역이 Downtown 중심지여서 사실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다운타운의 집들은 대부분 아파트 현관 입구에 철문이 설치되어 있고 열쇠로 열어야 들어갈 수 있다. 집을 나서는 순간 오물 냄새가 코를 찌르며 집이 없는 Homeless 홈리스들을 마주한다. 경찰들이 곳곳에 있으며 홈리스들의 싸움도 종종 목격하고 여러 범죄행위들이 도로 위에서 빈번하게 벌어진다.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버스와 바트 (Bart)라는 이름의 지하철을 타고 통학을 했다. 그만큼 대중교통을 통한 소소한 범죄에 대해 나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예방하려 했다. 2년간 샌프란시스코 중심지에서 거주했었던 나는 다행히 소매치기나 퍽치기 등의 일들은 당한 기억이 없다.

나는 버스를 탈 때 소지품을 깊숙이 넣어두고 항상 내 몸 앞쪽에 두고 볼 수 있게 했다. 그 계기는 어느 날 가방을 뒤로 메고 버스 탄 남자의 뒤에 서서 주위 눈치를 보며 열려고 손을 움직이는 흑인의 모습을 보고 난 뒤에는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나도 표적이 되겠구나 싶어서 눈을 똑바로 뜨고 나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살던 친한 동생이 겪은 일들도 내가 겁을 먹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나의 친한 동생 C양에 대해 그 당시 내가 들은 것들만 간략히 나열해본다.

버스에서 뒤로 맨 백팩의 지퍼를 열고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

남성 무리가 전문적으로 주차된 차량의 유리창을 깨는 장면들을 목격했다.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이폰을 손에 들고 걸어가는 도중 자전거 탄 흑인이 휴대폰을 낚아채갔다. 다행히 이어폰선이 꽂혀있어서 잡아당기는 순간 완전히 빼앗기지 않고 휴대폰이 C양의 앞으로 떨어졌다는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C양은 남자 친구와 함께 집 골목길을 걸어가는 도중 세명의 남성 무리를 만났는데 너클을 착용한 주먹으로 남자 친구를 폭행해 가진 소지품을 빼앗기고 병원에 3주가량 입원했다.


지금은 남편이 된 그 당시 나의 남자 친구는 차를 소유해서 운전을 하고 나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데이트하곤 했는데  까만 책가방을 차 뒷좌석에 두고 내린 후 그 가방 때문에 차량 유리창이 부서진 장면을 확인했을 때는 마음이 참 쓰렸다. 그 뒤로 나는 무조건 주차하기 전 차량 안에 있는 소지품들을 모두 안 보이게 넣고 치우고 예방했다.


가장 최근에 겪었던 무서웠던 순간을 내가 아이를 낳고 앙와 함께 둘이 집에 있었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보안이 굉장히 철저한 미국식 아파트 1층이었다. 아파트 초입에는 암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게이트가 있었고 아파트 건물의 공용 키를 사용해서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온 다음 복도를 통해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열어야 할 문도 많고 세대수가 많지 않은 아파트여서 항상 안심하고 안전할 거라고 믿고 살았다.

점심이 지난 오후 시간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겼다. 아이와 둘이 있어서 문을 잘 열지 않았던 나는 누구냐고 물었고 그 남자는 자신이 여기에 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내가 So what? 그래서 뭐?라는 뉘앙스로 나는 물었고 그는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하더니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곳을 떠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그렇게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우리 집 백 야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모기 창을 열고 이중창인 발코니 문을 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발코니 문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제발 열어달라고 사정했는데 눈으로 목격하는 게 공포스러워서 일부러 그 사람의 생김새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보안이 강한 곳이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나는 문단속을 아주 철저히 하는 편이었다. 그날도 발코니 문이 잠겨있었고 안을 볼 수 있는 블라인드까지 철저하게 닫아놓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나와 내 아이는 어떤 위험에 노출되었을지 아주 아찔하다.

바로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곧 도착해 아파트 건물 주위를 서성거리던 남자를 붙잡았다. 그리고 너무 무서워서 얼굴을 못 봤던 나를 밖으로 불러내서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선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목소리가 일치하는지 대조 확인을 하고 경찰차에 그 사람을 태워갔다.

그러고 나서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은 내가 이사 오기 전에 그 집에 살던 사람으로 최근 정신병 약 복용을 중단하고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갈 곳을 잃고 전에 살던 집으로 왔다는 것이다. 병원으로 가기로 약속하고 경찰이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 뒤에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계약기간이 끝나는 일 년쯤 더 살고 이사 갔다.


내가 만약 발코니 문을 잠그지 않았더라면,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더라면? 아찔한 상상 속에 나는 이런 예민한 성격을 주신 주님께 감사함을 올린다.


예민함은 나를 항상 힘들게 만들었었고 지금도 내 인생을 편안하게 흘러가게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민함이 내 일부분이면서 나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는 예방책이 되어준 게 아닐까. 예민함과 불안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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