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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소설<희망의 끈>운명과 기적

'우린 왜 이 세상에 나왔고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

by 박순영

요즘 연일 전세계의 관심과 화두가 되고 있는 튀르키예, 시리아 강진사태를 보면서 인간의 의지와 함께 운명이라는걸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 특히 지진 잔해속에서 태어나 죽은 산모와 탯줄로 연결돼 구조된 신생아의 기사는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만큼 인간의 의지와 운명은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거 같다.



게이고가 2019에 일본 현지 출판해서 우리에겐 2022에 찾아온 신작 <희망의 끈>은 잔뜩 얽혀있는 실타래같은 인간사의 숱한 에피소드를 접하게 해 마치 에밀졸라를 다시 읽는 느낌마저 주었다.



흥미로운것은 사건의 바깥에서 중심부로 파고드는 형사의 존재가 이 작품속에선 중심부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바로 마쓰미야라는 형사가 사건속 아야코와 이복 남매로 등장하는 것이고 이야기는 그들의 아버지인 마사쓰구 노인의 임종에 임박해 시작된다.






마치 작정하고 쓴것처럼, 수많은 등장인물과 일본어에 대한 감이 조금도 없는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성조차 다 외우지 못하고 읽어야 할 정도로 그들의 드나듦은 마구잡이식이라 할만큼 어지럽게 뒤얽혀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노련한 게이고는 그 실타래를 하나씩하나씩 조곤조곤 풀어내며 그들이 왜, 어떻게, 그렇게 운명의힘에 굴복하고 때로는 그것을 극복해 기적을 이뤄냈는가를 차분하게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다. 외신은 이번 작품을 '블록버스터'라고까지 칭했고 나역시 방대한 인간사의 한 페이지가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특출한 일본작가에 의해 쓰여졌음을 인정하는 바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우린 왜 이 세상에 나왔고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하는.

물론 남녀간의 (부모나 연인간의) 섹스의 결과물인것은 자명하고 그중엔 불륜, 치정같은 네거티브한 감정과 관계속에 이루어진것이 있다면 운명적인 결합에 의한 것도 분명 있는 것이다.

책 말미로 가면서 선대의 사랑과 그 사랑의 어긋남이 왜 그런 안타까운 과정을 거쳐야 했는가가 그려지면서 그 결과물로서의 '자식에 대한 이끌림과 애틋함'은 정당성을 얻는다.


"사진을 본 마쓰미야는 움찔 놀랐다. 거기에는 남자 둘이 찍혀 있었다. 한사람은 어린시절, 아마도 중학생일 마쓰미야였고, 그옆에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연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걸 모르고 본처에게 돌아가야 했던 남자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는 어릴적 자기처럼 야구에 빠져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다가 남긴 사진 한장이 주는 그 감동은 다스리기 만만치가 않다.



물론 게이고의 본령인 추리극인 만큼 누가, 왜 , 어떻게 살인(범죄)을 저질렀는가도 친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범인을 중반부에 밝히고, 그런 그녀를 미더워하지 않는 형사 둘(가가와 미쓰마야)의 끈질긴 추리끝에 결국 왜,라는지점에 도달하는건 게이고 정도의 추리에 대한 내공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추리와 재미, 호기심을 끝까지 끌어가는 그 힘은 대단하다.



범인은 다유코라는 여성이고, 그녀는 사실혼 단계의 남자가 무심코 내뱉은 '아이가 생기지않으면 갈라선다'는 말에 사로잡혀 결국은 살인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살인은 예전 두번이나 감행했던 낙태에 대한 죄의식의 병적 보상심리, 즉 상대에게 향하던 미움과원망이 방향을 틀어 자신에게로 향하는 행태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즉 그녀는 생명으로 상징되는 희망의끈을 두번이나 놓아버린것이다. 그렇게 희망을 거부한 결과 마음은 병들어, 자신을 진정 사랑해 설사 아이가 생기지않아도 헤어지지 않을거라는 남자의 본심을 간파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일으킨것이다.



이 살인사건의 발단은 타인의 수정란을 잘못 주입한 의료과실에서 시작된다. 조금은 상투적인 설정이고 게이고 작품 대다수가 어찌보면 쉽고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과실은 십수년 후에 살인까지 부르는 피의 과실이었다. 그것은 핏줄에 대한 연연함이 아닌 위에서 언급한'오해'에서 비롯됐다는게, 마치 부조리극의 한 편을 보는거 같아 비장감마저 들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1958-


그러나 대미를 장식한건 이복남매의 훈훈한 재회다. 그들은 어찌됐건 한 피를 나눠받은 남매고 그들의 공통된 아버지인 마사쓰구는 이제 비로소 모든것을 내려놓은채 맘 편히 이승을 떠날수 있게 된다. 그것은 얽히고 설킨 운명의 실타래 속에서도 자식이라는, 사랑이라는, 한줄기 빛,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낸 그들의 의지에서 발아된것이다.


"만날수는 없다해도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어. 그리고 그 끈이 아무리 길어도 희망을 품을수 있으니 죽을때까지 그 끈을 놓지 않겠다고 하더구나..."


동성애로 평생을 가슴앓이하면서도 결코 그감정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은 것 역시 사랑이라는, 그 감정의 소중함을 지켜가겠다는 그녀 둘을 이어주던 희망의 끈에 기인하리라.



흔히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들 한다 . 아무리 어렵고 억울하고 ,해서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시간도 견뎌내면 다 지나가는게 인생인데 단, 그것은 희망을 놓지 않아야 가능한것이다. 흘러가는대로 사는것 같아도 인간 하나하나, 생명 하나하나는 그 속에 저마다의 생명의 끈, 희망의 끈을 한가닥씩은 갖고 있다. 그렇게 해서 개인의 삶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 확장되는건 아닐까? 어쩌면 저멀리 흘러가는 구름도, 반짝이는 별들도 저마다 하나씩의 희망을 품고 있어 그렇게 흐르고 빛을 내는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해보게 된다.


시리아 강진에서 살아남은 탯줄아기.



복잡다단한 추리장르를 택해 그안에 인간사의 부조리와 허무함, 그러면서도 그것을 극복해내는 인간의 저력을 쉽게 그러면서도 일정수준의 문학성, 예술성을 유지하며 그려내는 몇 안되는 우리 시대 작가중 하나가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데 큰 이견은 없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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