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선영이 혼전 임신을 해 급히 결혼한다면서 손을 벌려와 선미는 서울집을 빠르게 헐값에 처분하고 일부를 선영에게 주고 자신은 경기도 후미진 곳으로 이사를 온것이다.
선미에게 선영은 자식이나 다름없는 동생이었다. 어릴때 부모를 사고로 여의고 둘은 각기 친척집에 맡겨져 성장했고 그래서 1년엔 한두번이나 볼까 말까한 동생 선영이 선미는 여간 걱정이 되는게 아니었다. 그리고는 여고를 졸업한뒤 곧바로 무역회사 경리로 취직해 일찍 돈을 벌기 시작한 선미는 선영부터 데려와 같이 살려고 하였으나 당시 선영은 같은 공장에 다니는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그래서 선미는 먼발치에서 동생을 봐야 했다. 그런 선영이 급기야 임신을 하였고 그 둘은 곧바로 식을 올리기로 하였다는 말에 선미는 이것저것 잴것도 없이 자신의 서울집을 처분한 것이다.
그렇게 선영을 시집 보낸뒤 선미는 얼마 안되는 남은 돈으로 집을 구하기 위해 있는대로 발품을 팔다가 결국 지금 이곳에 터를 마련했다.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가격에 그래도 방 두칸이 딸린 아파트를 얻을수 있어 선미는 그것으로 만족했고 짐이 많지 않은 그녀는 환기에게 그의 짐을 갖다 놔도 된다고 하였다.
환기는 선미가 근무하던 회사의 거래처 직원으로 알개돼 1년여의 탐색기간을 거쳐 연인으로 발전했고 나중에 알고보니 일찍 결혼해 아이가 있는 이혼남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말하던 때의 환기는 선미와 제대로 눈도 맞추지 못했지만 선미는 그정도의 문제로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원래 전처가 맡아 키우기로 하였는데 그녀가 재혼을 하게 됐다면서 아이를 데려와서 지금은 환기가 맡아 키우고 아이의 학교가 있는 , 선미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환기는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지금은 사촌형의 가구업을 돕고 있는데 가구산업이 온통 온라인으로 넘어가면서 거의 폐업이나 마찬가지여서 급여도 제대로 못받고 거의 쪽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아이와 살고 있다. 점점 늘어나는 아이의 짐에 환기의 짐까지 합치면 원룸은 발디딜 곳도 없을만큼 비좁아 그는 늘 '한평만 컸으면'하는 바람을 토로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작게나마 방이 두개나 있는 집으로 이사한 선미는 그에겐 구원투수나 다름없었고 그렇게 환기는 학창시절 탐닉했던 니체니 벤야민등의 책들을 잔뜩 선미 집으로 옮겨 놨다. 그렇게 해서 그방은 곧 환기방이 되었고 선미는 이러다보면 언젠가 합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에 잠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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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 집을 6개월도 안돼 그녀는 다시 내놔야 했고 집은 내놓은 지 보름도 안돼 덜컥 나가고 말았다.
그녀가 집을 옮기는 이유는 다름아닌 또 동생 선영때문이었다. 지금은 결혼해서 제부가 된 남자가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한다고 돈을 무리하게 끌어다 썼다가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것이다. 해서 살던 집 보증금을 빼서 변두리로 나가게 됐다면서 그 돈마저 부족하다고 엉엉 울어대는 선영을 선미는 또 챙겨야 한다는 마음에 이 집을 내놨고 그렇게 집은 빠져버렸다.
하지만 환기에게는 그냥 '너무 외져서 차가 없으니까 불편해'라고만 하였고 환기는 잠시 전화너머에서 숨을 고르더니 '알았어. 이번주말에 가서 내 짐 가져올게'라며 몹시 기분이 상한듯 말을 하였다.
선미는 예전 경리업무를 하던 회사에 전화를 걸어 혹시 자리가 나지 않았을까 하였지만 전화를 받은 사장은 냉랭하게 반응하면서 이미 젊은 여직원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녀가 그 회사를 그만 둔것도 어찌보면 그 사장때문이었다. 손버릇이 나쁜 그는 어느날 몇 안되는 직원 회식자리에서 식탁밑으로 선미의 허벅지를 더듬은 것이다. 화들짝 놀란 선미가 '무슨 짓이예요!'하고 반응하자 그는 얼굴이 벌개지더니 그 다음날 해고통보를 하였다. 그렇게 남은 급여도 떼먹히고 그곳을 나온 선미는 한두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이렇다 할 스펙도 없는 그녀를 선선히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선미는 이리 된 바엔 기술이라도 하나 배워 자기 가게를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돈을 조금씩 모았는데 그 돈도 이 집을 살때 헐게 되었다. 그래도 선미는 동생 선영이 잘 살아주면 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버텨왔다...
"다음주에 와서 너 짐 싸는거 도와줄게"라며 그는 휑하니 자기짐을 챙겨 가버렸고 선미는 왠지 그와 이별하는 느낌에 마음이 짠해왔다. 그게 아닌데..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지만 언제까지나 감상에 젖어있을수 없는게 이사가 촉박하게 잡혔기 때문이고 아직 갈 집을 구하지도 못한 터였다. 그래놓고 짐부터 싼다는게 어이가 없긴 했다.
"저기..."
이사가 2주앞으로 다가온 어느날밤, 선미는 한밤에 환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기짐을 가지러 온 날 했던 약속을 어기고 화가 단단히 났는지 아니면 내심 서운했는지 한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짐을 싸러 오지도 않았다.
"나 아직 갈 집을 못 구했잖아"
라는 그녀의 말에 환기는 한참을 침묵했다.
"너 , 나랑 헤어질 마음에 그 집 판거 아냐?"
"그런거 아냐..실은 선영이"
"또 니 동생 얘기냐? 지긋지긋하다"라며 그는 전화를 끊을 태세였다.
"끊지 마...."라고 그녀는 애써 그를 붙들었다. 그러자 그도 좀 수그러들었다.
그날 이후로 둘은 여기저기 바삐 집을 보러 다녔지만 선미가 쥐고 있는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무리 외곽으로 나가도 방 두칸은 힘들다는 결론에 선미는 이제 모든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이제 얘긴데, 아들좀 크면 데리고 니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어"라며 환기는 신호를 받고 차를 세우며 툭 내뱉았다.
"당신 한번도 나랑 합친다는"
"난 너하곤 처지가 달라. 애도 딸리고 아무래도 애 동선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사내놈이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 명의 집에 들어가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해서 내 힘으로 방 두칸짜리 하나 구할때까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깊이 잠겨있었다.
"미안해 환기씨"하며 그녀가 그의 한손을 살며시 잡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결국 우린 이렇게 헤어지는구나...그깟 방 두칸이 없어...
일단 단기 임대에 들어가서 더 외곽에 집을 얻을 생각을 한 선미가 마지막 짐들을 싸고 있는데 도어락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번호를 아는건 동생 선영과 환기뿐이었다. 아마도 언니의 이사를 도우러 온 선영이겠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선미는 선영대신 환기가 잔뜩 헌박스며 이사도구를 들고 들어서는걸 보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 그날 완전히 헤어진게 아니었나....그녀는 의구심에 그에게 앉으라는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나 방 뺐다"
그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리기까지 선미는 한참이 걸렸다.
"내 보증금이랑 니 돈 합치면 어디 서울외곽에라도 "라는 말에 선미는 참았던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작은새처럼 떨고 있는 그녀를 환기는 포근히 안아주었다.
"명의는 내 이름으로 할거야.. .너, 선영이한테 계속 퍼주는거 나 더는 안본다"라는 그의 으름장까지 감미롭게 들려왔다. 보호자...이제 비로소 선미에게도 든든한 보호자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좀더 크면 혼인신고부터 하자는 말에 선미는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거 없어도 돼."
"너 바보야? 아님 나랑 살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고..."
선미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눈물로 두범벅된 그녀의 두뺨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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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후, 둘은 허름하지만 분명 방이 두개나 있는 연립으로 짐을 옮겼다.
환기의 아이는 가끔 본 아줌마와 함께 살게 됐다는 아빠 환기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새 친구들을 사귀러 뛰쳐나갔고 환기와 선미는 다 먹은 자장면 그릇을 문앞에 내놓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이사준비에 몸살이 난 선미가 계속 콜록거리자 환기가 약을 사오겠다며 밖에 나가려고 덧옷을 챙기는데 그런 그를 살포시 안으며 선미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