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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휘 Nov 19. 2024

남편의 커피셔틀

고마운 줄 모르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건 남편의 전화였다.

"엘리베이터 커피 올려 보낼게, 일어나"


어젯밤 독서토론 줌 모임을 마치니 11시 반이었다. 꼬박 2시간 반동안 이야기를 하고 나면 무척 피곤한가 보다.

난 그걸 못 느낀 채 잠에 빠졌지만 이렇게 아침이 되면 일어나기 힘든 것이 체력이 달리나 보다.

아들에게 스스로 옷도 챙겨 입고 시간 되면 학교엘 가라고 한 채 나는 침대와 한 몸으로 8시 40분까지 누워있다. 이런 날이 일 년에 한두 번 꼭 있다. 아들에게도 미안한 날.

남편이 나가면서 "왜 못 일어나?" 한다.

"너무 피곤해~~" 하는데 아들이 책가방을 메고 들어와 뽀뽀를 하며 학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한다.

아들과 같이 나가는 남편에게 커피~라고 말했다.

"나 지금 시간 안 돼 서울 올라가야 해"

"맨날 시간안 된대!!" 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더 자야지 생각했다.

전화벨이 울리고 엘베에 커피 실어 올려 보냈다는 남편 전화에 벌떡 일어났다.

'칫, 바쁘다더니' 나는 생각한다.


남편의 커피셔틀은 때론 매일아침마다, 때론 하루의 중간 어디쯤에서 진행된다.

책을 읽어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시간 중 커피를 사러 다녀올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날 보며 남편이 기꺼이 내가 해주겠노라 한 일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먹고는 있지만, 사실 그게 보통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닌데 남편은 나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다. 새삼 고마울 것도 없다 싶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그런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빤 왜 자꾸 이 빵을 사?" 언젠가 식탁에 놓인 '샐러드빵'을 보며 아들이 물은 적이 있었다.

자기는 안 좋아하는 빵인데 왜 자꾸 사 오냐는 투였다."이거 네 거 아니야. 엄마가 좋아하는 거야"

나는 그 얘길 멀찌감치서 안 들리는 척하며 들었다.

'내가 저 빵을 좋아하나?'싶었다가 사 오는 족족 내가 다 먹어치우는 걸 보니 내가 좋아하는가 보다 한다.


나는 남편과 그다지 알콩달콩하게 살고 있지 않다.

그냥 10년쯤 살고 보니 우스갯소리로 하는 그런 말들처럼 살고 있다.

전우애. 식구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의리로 살아. 등등... 그냥 그 비스무레 언저리쯤 되는..

이렇게 따분하고 재미없는 남자에게 그렇게 홀린 듯 끌렸던 과거의 내가 한심할 정도로 남편에게 더 이상은 애정도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남편도 나도 애교가 없는데 그 와중에도 우위를 따지자면 나보단 남편이 애교가 있는 셈이다.

주변엔 20년이 되어도 신혼부부처럼 사진을 찍을 때마다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와 허리를 감은 손 등의 포즈를 취하는 지인들이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진기한 풍경을 보듯이 그 사진의 디테일 속에서 가식이라든가, 허점이라든가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켠다. 내가 그럴 수 없으면 남들도 그럴 수 없어야 하는데 왜 그들은 되는 거지? 하는 마음인 것이다. 질투가 났겠지.

우린 사진을 찍을 때도 세상 어색한 사이다. 그마저도 잘 찍질 않는다.


이런 우리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사실 원인은 나에게 있다.

성격이 워낙 무뚝뚝한 데다 애교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고 거기에 더해 표현하는 것이 서툴고 어색해서 안 해버리는 스타일이 바로 나다.

목석같은 아내와 사는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참 재미없게도 생겼다.

따뜻한 말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미안하단 말도 안 하는 나란 여자.

그럼에도 이런 나를 남편이 잘 적응해 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가 남편에게 맞추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남편은 나에게 요구사항이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남편은 내가 시키는 일을 정말 잘한다. 심부름 같은 귀찮고 하찮은 일을 더욱 잘한다.

하면서도 '네가 해'라는 말을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졌고, 남편은 그런 일을 귀찮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랬던 내가 오늘 아침 엘베에 실린 커피를 보며 남편도 귀찮겠다 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드는 것이다.

뭐지? 왜지?

그냥 이제 조금이나마 양심이라는 것에 스파크가 튀었나?


매일 감사일기를 적는다.

특별히 감사할 일은 거의 없지만 꾸역꾸역 5가지를 찾아 적는데 대개 식구들이 건강해서, 내가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말은 남편이 건강해서, 남편이 바빠서, 남편이 심부름을 잘해줘서.....이다.

습관처럼 쓰는 거였는데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남편에게는 정말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하러 나가면서 카페에 가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집까지 다시 와서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커피를 싣고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커피 가져가라고 말하는 일을 보통의 여느 남자들이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가만 생각해 보니 남편은 언제나 나와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큰 싸움이 되지 않게 곧잘 자리를 피했고, 징징대는 내 말에 부르르 하긴커녕 마치 귀 닫은 듯 듣고만 있기도 했다. 남편은  언제나 묵묵하고 수더분하게 제 자리를 지켰을 뿐인데 내가 그 주변을 맴돌면서 늘 벌처럼 쏘아댔다.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나는 칼과 방패 같다. 어느 쪽도 공격이 될 수도 방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칼은 나였다.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을 나는 거의 하지 않는 반면 남편은 곧잘 한다.

내가 왜 이 남자랑 결혼까지 했을까를 자주 생각하곤 한다. 과거로부터 우리를 끌어올려보면 남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아서 나를 화나게 하는 것도 있지만, 변하지 않아서 우리가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엄마는 늘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이 서방 같은 남자가 어딨니? 그 지랄 맞은 니 성격을 다 받아내고 사는 거 보믄 아주 딱해죽겠다."

'헐........... 뭐가 또 그렇게 딱하기까지...'

내가 정말 그토록 지랄 맞았을까... 생각해 본다.



찌뿌둥한 몸을 커피 덕분에 일으키고 요가매트를 편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오늘 나의 일과를 시작해야겠지.

왜인지 모르게 오늘따라 남편이 사다 준 커피에 자꾸 눈이 쏠린다.

그리고 소심하게 '고마워'도 아니고 '땡큐여' 카톡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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